에스프레소 (기억 그리고 존재 1)
#1 [몽탁 마음 공작소] 효라빠 장편소설.
따스한 아침 햇살이 카페의 통유리를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모미아는 'mong tag'이라고 쓰인 앞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손님 받기 전 아르바이트생도 없이 혼자 로스팅을 하는 이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구수한 원두 냄새와 차분히 가라앉는 기분이 모든 상념을 잊게 만들었다. 도와주는 이 없어 힘들고 외롭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외로움을 즐길 만큼 여유도 생겼다. 한 골목에 몇 개씩 유행처럼 커피 전문점이 생긴 이후로 5년 동안이나 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장사를 해왔다. 이상한 손님들과 더 이상한 아르바이트생 때문에 눈물 흘리며 가게를 접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일들을 웃으며 추억으로 이야기할 만큼 경험도 쌓였다.
생두 볶는 냄새가 인적 없는 이른 아침의 거리를 그녀의 마음처럼 포근하게 만들었다. 카페 주변을 헤매던 주인 잃은 강아지도 향긋한 커피 향이 나는 몽탁으로 코를 킁킁거리며 앙증맞은 발을 옮겼다.
미아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려 거리가 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그날 손님들에게 내줄 커피를 직접 마셔 보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오픈 전이라 홀에는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 내려진 진한 에스프레소만이 자신의 친구가 되고, 자기를 사랑해 주는 무언가가 되는 것 같았다. 크지 않은 미아의 손에도 작아 보이는 에스프레소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마시기 전 코 끝에 전해지는 진한 향기에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리곤 커피를 머금었다. 황량한 사막처럼 건조하게 메말라 있는 가슴에 사랑이 채워지듯, 입안의 에스프레소가 그녀의 가슴에 스며들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몽탁(夢卓)'이라는 커피하우스를 하며 손님들에게 향긋한 커피를 내주는 것만큼, 자신이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도 많은 행복감을 느꼈다. 힘들어도 가게 문을 닫지 않고 꾸준히 영업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 이기도 했다.
'딸랑~ 딸랑~'
얼마 전 산사에 갔을 때 사와 현관문에 달아놓은 풍경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안녕하세요~. 사장 니임~"
아르바이트생 종일이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 종일은 시험을 치르면 매번 알바를 하러 왔다. 대학 졸업하고 집에 손 벌리는 게 눈치가 보였는지 직접 생활비를 벌어 썼다. 수험 생활을 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합격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눅 들지 않고 항상 애교 있는 목소리로 밝게 인사했다. 그 점이 좋아 덜렁대고 가끔은 사고도 치는 종일과 몇 년간 인연을 이어 오고 있었다.
"차 한 잔 마셔~"
"안 그래도 아아 한 잔 하려고요. 사장님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분위기 잡고 계시네요? 하하"
"분위기? 그래 보여?"
종일의 장난기 어린 말에 미아가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종일도 'mong tag'이라고 적힌 앞치마를 두르고 머신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내려 얼음과 물을 넣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었다. 그리곤 밖으로 나가 야외에 놓일 의자와 테이블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었지만 영업준비 중인 종일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아직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지만 수험생활의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니면 땀 때문인지 이마의 M자 탈모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영업 준비를 끝내고 직원용 하늘색 야구 모자를 쓰자 다시 앳된 대학생 같았다.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한 명 더 있지만 점심 무렵 손님이 많은 시간에 오는 터라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자 미아는 유튜브에서 자동 재생되는 음악을 틀었다. 선선한 가을 날씨에 걸맞게 분위기 있는 클래식을 골랐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카페에 울려 퍼지자 장사 시작을 알리는 것 같았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조용히 음악을 듣던 미아에게 종일이 다가와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카운터 정리하는데 구석에서 사진이 나오던데. 이 분 사장님 맞죠? 옆에 남자와 아이는 누구예요? 엄청 행복해 보이는데..."
"사진? 무슨 사진?"
종일의 손에는 오래돼 보이진 않지만 누렇게 바랜 사진 한 장이 들려있었다. 종일의 말대로 사진 속 미아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밝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갓 돌이 지나 보이는 남자아이는 미아의 가슴에 안겨 칭얼거리며 미아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고 있었고, 핸썸하게 생긴 남자가 아이의 손에 잡힌 머리카락을 빼내며 미아처럼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은 누가 보아도 단란한 가족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아는 그 사진을 언제 찍었는지, 사진 속 아이와 남자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사진을 받아 보았을 때는 혼자 사는 자기 모습과 너무 이질적이라 다른 사람 일 거라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사진 속 여자는 자신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 기억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하얀색 도화지 같았다. 미아는 아무리 봐도 누군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만 양 옆으로 저을 뿐이었다.
'딸랑~ 딸랑~ 딸랑~'
현관문에 달린 풍경이 첫 손님이 왔다며 온몸을 흔들었다. 종일에게 받은 의문의 사진은 다이어리에 넣어두고 주문을 받기 위해 카운터로 갔다. 커피하우스 몽탁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영업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문 닫을 때가 되었다. 손님이 많이 오면 돈을 벌어서 좋았고 시간이 잘 가서도 좋았다. 오늘 매상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사람으로 발 디딜 틈 없이 장사가 잘 되는 건 아니었지만 알바생 두 명 월급 주고 혼자 생활하고도 남을 만큼의 수익은 나왔다. 알바생 먼저 퇴근시키고 마감을 했다. 수입과 지출을 적으려고 다이어리를 펼치자 아침에 종일에게서 받은 사진이 뒤집혀 있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사진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진을 다시 보았지만 아이와 남자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뒤의 배경이 자신의 집인 건 확실했고 사진 속 모습이 그냥 친근한 정도가 아니라 가족 같아 보이는 것도 확실했다. 미아에게 결혼한 언니가 있었지만 아이는 조카의 어릴 적 모습이 아니었고, 남자는 그녀의 형부도 아니었다. 사진을 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버리기에는 먼가 찜찜해 다이어리 뒷장에 다시 끼어두고 퇴근했다.
집에 들어온 미아는 거실 티브이부터 켰다. 기다리는 이 아무도 없이 텅 빈 창고 같은 집에 티브이에서 나오는 사람 소리라도 있어야 혼자 생활하는 외로움과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워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주인 없는 빈 집에 자신과 같은 외로운 존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녁을 먹지 않아 배가 고팠지만 미아는 주방으로 가지 않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실의 테이블을 옮겼다. 마음이 허전하거나 무언가 외로움을 느낄 땐 거실이나 침실의 가구를 옮겼다. 힘이 들었지만 위치를 바꿔놓으면 새로운 마음이 들고 기분도 좋아졌다. 끙끙거리며 테이블을 옮긴 후 이번엔 소파를 옮기기 위해 거실 바닥에 못쓰는 담요를 깔았다. 작은 체구의 여자 혼자 하는 게 힘들어 유튜브 검색해서 찾은 새로운 방법이었다. 가구 위치를 바꾼 뒤 정리하는데 소파 팔걸이 틈새에 사진 한 장이 끼여 있었다. 사진을 보기도 전에 미아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말로 표현되는 않는 여자의 촉이었다. 사진을 집으려고 뻗은 팔에 소름이 돋아 피부가 오돌토돌 해졌고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렸다. 좁은 틈 속에 손가락을 넣어 사진을 잡았다. 가슴이 뛰었다. 미아는 깊은숨을 들여 마셨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사람 소리는 이제 그녀의 의식 밖에 있었다. 모든 신경이 손에 들려있는 사진에 집중되었다. 사진에 붙어있는 해묵은 먼지를 털어 내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미아와 아이 그리고 남자가 있었다. 다이어리 속 사진과 다른 점이라면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남은 유일한 혈육인 언니 수경이었다. 사진 속에서도 미아와 남자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제 찍었는지 기억 속에서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미아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경은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 나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퇴근했어?]
수경이 아이들 뒤치다꺼리하느라 정신없는 듯 피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바쁘지?]
[아냐, 괜찮아 말해]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음이 스마트폰을 통해서 느껴졌다. 미아는 급한 대로 용건만 물었다.
[집 정리하다 우연히 사진을 발견했는데 뭔가 이상해서 그래. 사진 속에는 언니도 있거든. 몇 년 전인 것 같은데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아. 언니는 알 수 있을까 해서 전화했어]
[무슨 사진인데?]
수경도 궁금한 듯 물었다.
[내가 돌 지난 아기를 안고 있던데. 옆에 모르는 남자도 있고, 언니랑 몇 년 전에 돌잔치 다녀왔나?]
[그런 적 없는데... 무슨 사진일까? 카톡으로 보내봐. 말로 해서는 모르겠다.]
[알았어. 바로 보낼게]
미아는 사진을 찍어 카톡 방에 올리고 전송버튼을 눌렀다.
[사진 보이지?]
[......]
카톡을 확인한 수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옆에서 뛰어다니며 꿍꽝거리는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래층의 노부부가 시끄럽다고 누를 인터폰 걱정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스마트폰 속 미아가 보낸 사진을 보며 말라비틀어진 고목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언니! 언니!]
미아의 소리도 듣지 못하고 한참을 서 있는 수경을 소파에 앉아있는 남편이 불렀다.
"여보, 뭘 보는데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애들 시끄럽게 돌아다니는데 머라 하지도 않고"
"아니... 아니에요"
등 뒤에서 부르는 남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전화기에서는 미아가 답답하다는 듯 계속 불러 대고 있었다.
[미아야...]
[사진 봤어?]
[응.]
[그럼 대답을 해야지 왜 말이 없어. 몇 번을 불렀는데]
말 못 하는 벙어리가 된 것 같은 수경의 태도에 미아는 긴장됐다.
[정말 기... 기억이 안 나?]
수경의 목소리가 부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언니한테 물어보지.]
[우리 만나서 얘기하자. 지금 애들 때문에 바쁘네. 내일 카페로 갈게]
[알았어, 그런데 언니는 누군지 알겠어?]
내일 만나 얘기하자고 했지만 미아는 아이와 남자만이라도 미리 알고 싶었다.
[내일 얘기해...]
무언가 숨기는 것처럼 급하게 끊으려는 수경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미아는 전화를 끊었다. 수경은 멍하니 서서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처제 하고 통화한 거야? 뭔데 그래?"
"미아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처제가 이상하다니 무슨 소리야?"
"미아가 사진을 보여줬는데 누군지 못 알아봐"
"무슨 사진인데?"
"제부 하고 럭희와 함께 찍은 사진... 사고 나기 전에 찍은... 세상 행복할 때 찍은 사진... 엉엉엉"
"뭐라고!"
수경이 말을 맺지 못하고 주저앉으며 흐느꼈다. 아무 기억나지 않는다는 미아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충분이 이해되었다. 비 오는 그날의 사고는 미아를 죽기보다 더 힘들게 만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수경도 가슴 한편이 잘려 나가는 듯한 괴로움을 겪어야 했으니, 미아는 자신과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고통이었을 거라고 수경은 짐작했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