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갈등 1)
#4 [몽탁 마음 공작소] 효라빠 장편소설
집에 일이 있다며 일찍 퇴근한 종일은 부랴부랴 택시를 잡아 탔다.
[종일아. 집에 빨리 좀 올 수 있니? 엄마가 몸이 안 좋네.....]
택시 안에서 저녁 무렵 엄마에게 온 문자 메시지를 다시 열어 보자 손이 떨리고 깊은 한숨이 나왔다. 엄마는 웬만해서는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냈 다는 건 무슨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종일의 엄마 금화는 가정 폭력에 시달려 왔다. 폭력의 주범은 남편 상철이었다. 상철은 강력계 형사로 퇴직한 전직 경찰이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한 번 흥분하면 감정 조절을 잘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혼해 타지에서 살고 있는 세 살 터울의 누나 소영을 포함해 모든 가족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 아버지는 유독 엄마를 못살게 굴었다. 종일은 가족에 헌신하며 평생 자식 뒷바라지 해오며 살아온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쓰라려 왔다. 엄마는 아버지 곁에서 고통스럽게 살면서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불쌍한 엄마에게서 문자가 와있었다. 아버지와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바로 짐작됐다. 집에 도착한 종일은 불안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창가에 있던 몬스테라 화분이 깨져 거실 바닥에 흙과 잎사귀들이 사방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태풍이 모조리 쓸고 가버린 거리처럼 집안은 난장판이고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엄마가 어떤 상태일지 겁이 났다. 종일이 집에 있을 때는 흥분한 아버지를 말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자신이 없을 때 큰 사고가 난 적이 몇 번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작은방 문을 열었다. 금화는 방바닥에 깔린 얇은 요 위에 시멘트 바닥에서 말라비틀어진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벽을 향해 누워 있었다. 종일이 들어왔지만 금화는 아무 말 없었다. 끙끙 거리는 얕은 신음 소리만 가냘프게 무거운 방 안의 공기를 밀어내고 있었다. 종일의 코가 시큰 거렸다.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어금니를 깨물었다.
"엄마. 저 왔어요."
"......"
"몸이 안 좋다며... 엄마~ 어디 아파?"
"여... 옆구리가 이상하게 아프다"
금화가 가녀린 목소리로 몇 마디 했다.
"아빠가 그러신 거예요?"
"......"
금화는 대답이 없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주 있지는 않았지만 상철은 금화와 말다툼하다 감정 조절이 되지 않으면 손찌검도 했다.
"엄마, 병원 가보자"
종일이 엄마의 등을 보며 말했다. 구부려진 허리의 가는 척추뼈가 희미하게 옷 위로 불쑥 튀어나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종일이 어금니를 더 꽉 깨물었다.
택시 타고 집으로 올 때는 손발이 떨리고 가슴이 쿵쾅거려 미칠 것 같더니 막상 엄마의 힘없는 목소리를 듣자 종일도 온몸에 기운이 빠져 버렸다. 병원을 가보자는 말에도 꼼짝 않고 누워있는 엄마가 안타까우면서 화가 났다.
"조금 누워있으면 괜찮아지겠지...."
"엄마. 이혼해라. 누나랑 나 이제 다 컸어. 이렇게 사느니 이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
금화는 또 말이 없었다. 추운 겨울 새벽 이슬이 작은 풀잎에 내려앉아 서리를 만들듯 눈물만 조용히 베개를 적셨다. 흐느끼는 금화의 어깨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종일은 엄마가 불쌍하면서도 그 모습이 싫었다. 안아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터벅터벅 거실로 나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늦가을 추수가 끝나 참새도 오지 않는 논가에 찬바람 맞으며 펄럭이는 허수아비가 된 기분이었다. 멍하니 거실 벽에 걸린 시계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초침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끼이이익~' 안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생활하는 방이었다. 상철은 종일이 와 있는 걸 보고 무안했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먼저 말을 꺼냈다.
"아르바이트하고 왔냐?"
"네."
종일이 무표정하게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하는 엄마를 볼 때면 모든 걸 박살 내 버리고 싶었지만 막상 아버지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이 멍청해 보였고 그래서 아버지가 계속 저렇게 행동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밥은 먹었냐?"
"아버지. 도대체 왜 그러세요? 왜 엄마를 이렇게 힘들게 하시냐구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게 뭐냐구요?"
"밥 먹고 있는데 계속 잔소리를 하잖아. 내가 말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하면 될 거를 왜 자꾸 성질을 건드려서 이러는지 모르겠다. 너도 알잖아. 내가 한 번 화나면 주체가 되지 않는 거. 한두 해 산 것도 아닌데 그걸 지금까지 못 맞추네. 이러니 내가 성질이 나겠냐? 안 나겠냐?"
"그래도 그러면 안 되죠. 아버지가 경찰로 30년 넘게 근무하셨으니 폭력이 어떤 건지 잘 아시잖아요. 어떻게 그러신 분이 집에서는 자기 부인한테 폭력을 행사하냐 말이에요. 이건 뉴스에 나올 일이에요!"
차분하게 말하던 종일이 자기 잘못은 없고 엄마가 기분을 맞추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보자 울화통이 터져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서 너는 내가 잘못했다는 거냐?"
"그럼 아버지 잘못이지 누구 잘 못이에요?"
"이놈의 새끼가 아버지한테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이놈아 내가 평상 공직에 있으면서 너희들 학교 보내고 가정 건사 안 했으면 네가 이렇게 살 수 있었냐? 아버지가 노름을 했냐? 술을 마시고 다녔냐? 그렇다고 계집질을 했냐? 성질이 다혈질이라 엄마랑 싸우면 주체를 못 해 가끔 그러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 다 필요 없다. 자식새끼들 키워놓으면 자기 잘나서 그런 줄 안다더니.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네. 지금까지 누가 벌어서 너 학교 보내고 뒷 바라지 했냐. 말해봐라 이놈아!"
상철의 목소리가 커지고 얼굴이 울긋불긋 해졌다. 주먹 쥔 손이 벌벌 떨렸다. 마주 보고 있는 종일이 긴장 됐다. 종일에게 아버지는 무서운 존재였다. 어렸을 땐 사소한 잘못만 해도 두들겨 맞았다. 그 기억은 성인이 돼서도 종일의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아버지와 비슷할 정도로 체격도 커졌지만 여전히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 자신에게 직접적인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흥분하면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대화하기 무서웠다. 같이 흥분해서 언쟁을 벌였다간 주먹이 날아오던가 아니면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날아올 거 같았다.
"아버지 그 말이 아니잖아요"
흥분해 눈이 붉게 물든 아버지를 보자 종일의 목소리가 쪼그라들었다. 작은 방에 있던 금화가 옆구리를 감싸 쥐며 거실로 나왔다. 더 큰일이 벌어질지 몰라 걱정 돼 누워 있을 수 없었다.
"종일아 그만하고 들어가자."
금화가 종일의 팔을 끌며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녀의 얼굴빛이 갈수록 창백해지는 게 옆구리를 많이 다친 듯 보였다.
'평생을 다 바쳐 돈 벌어다 새끼들 키우고 가정 건사했더니, 정년퇴직하고 집에만 있으니 만만해 보이냐! 이것들이 이제 같이 아버지를 무시하네. 그래 잘났다 잘 났어? 집안 꼬락서니 잘 돌아간다!'
흥분한 상철이 작은방에 있는 금화와 종일 들으라고 그러는지 아니면 혼자 분에 못 이겨 그러는지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들어줄 상대가 없었는지 이내 상철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거실이 조용해졌다.
금화는 가슴이 답답해 터질 듯했다. 21살, 어린 나이에 형제 많은 집 큰 아들에게 시집와 가족들만 생각하며 살았다. 애들 키우느라 힘든 것보다 큰 형수로서 나이 차이 나는 시동생 뒷 바라지 하는 게 더 힘들었다. 박봉의 공무원 월급으로 먹고살기 힘들어 젊었을 때는 작은 구멍가게까지 하며 종일의 세 작은 아버지를 대학 공부까지 시켰다. 거기다 시부모 제사와 명절 차례까지 고달픈 세월이지만 그때는 다들 힘들게 살았기에 팔자려니 하고 버텼다. 이제는 할 만큼 했고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상철이 하는 말 하나하나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고 조금씩 반항심도 들었다. 바보처럼 살지 말라는 종일의 말도 어느 순간부터 지나치지 않고 가슴속에 켜켜이 쌓였다. 그녀는 사람의 인생이 아니라 소같이 일만 하며 살았다. 날이 좋다고 아이들과 근처 바람 쐐러 가지도 못했고, 친구들과 가는 그 흔한 꽃놀이 한 번 가지 못했다. 이제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사람답게 살다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철은 자신의 말에 틱틱거리면 흥분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그는 금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 보다 정년 퇴직하고 집에만 있는 자신이 힘이 빠져 대놓고 무시한다고 여겼다. 그럴수록 감정 조절을 못했고 더 폭발했다.
종일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좋게 풀어보려고 가운데서 노력했지만 엄마와 아빠 사이의 골은 대화로 풀기에는 너무 깊었다. 누나가 결혼한 후에 엄마가 더 적극적으로 나오자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흥분하는 날이 많아졌고 수시로 둘은 부딪쳤다. 종일도 이제는 지쳐 각자의 길을 가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금화가 화장실 가기 위해 큰방으로 들어간 상철의 눈치를 살피며 거실로 나갔다.
'아악~'
작은 방에 멍하게 앉아있던 종일에게 날카로운 엄마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