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갈등 2)
#5 [몽탁 마음 공작소] 효라빠 장편소설.
종일이 거실로 뛰쳐나갔다. 엄마가 쓰러져 있었다. 아버지는 옆에서 화를 못 이겨 씩씩 거리고 있었다. 화장실 가기 위해 나오던 금화는 상철과 마주쳤고 '이제 살 날도 얼마 안 남았으니 적당히 하라'는 그녀의 말에 상철은 분을 참지 못하고 손으로 금화를 밀쳐 버렸다. 넘어지며 식탁 모서리에 부딪친 금화는 옆구리를 움켜줬고 고통으로 얼굴이 일 그러 졌다.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온 그녀는 웬만큼 아파서는 누구에게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고통이든 불편함이든 참는 게 당연한 듯 살아왔다. 그걸 잘 아는 종일은 끙끙 거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엄마가 많이 다쳤을 거라 짐작했다. 움직일 때마다 힘들어하는 엄마를 일으켜 세우기도 쉽지 않았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금화를 태워 병원 응급실로 차를 몰았다. 통증을 억지로 참으려는 신음 소리가 옆에서 들려오자 종일은 아버지에 대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병원에 도착해 x-ray 촬영하니 갈비뼈가 골절되어 있었다. 담당 의사는 뭔가 의심이 되는지 어떻게 다쳤냐고 물었다. 금화는 넘어졌다고만 했다. 옆에 서 있던 종일은 자신을 올려다보던 의사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했다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돌았지만 차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사실대로 얘기했다면 거들었을 텐데 그러지 않자 자신도 입을 닫아 버렸다. 의사 선생님이 갈비뼈는 깁스할 수는 있는 부분이 아니니 안정을 취하며 움직이지 않으면 알아서 붙는다고 했다. 팔에 꽂아놓은 수액을 마저 맞고 집에 가기로 하고 둘은 소란스러운 응급실의 구석진 침대에 자리 잡았다.
"엄마, 아버지와 이혼하세요."
종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수액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일정하게 떨어지는 방울처럼 종일의 말도 전혀 파동이 없었다. 그전부터 마음속에 들어 있는 말을 꺼내는 듯했다. 눈을 감고 있던 금화가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을 종일에게 풀어놓았다. 없는 형편에 시 동생들 뒷바라지했던 이야기부터 종일이 태어나기 전 형이 있었는데 돌을 넘기지 못하고 열병으로 갑작스레 하늘로 보낸 이야기까지 담담하게 말했다. 몇 번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었고 처음 듣는 사실도 있었다.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는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흥분하기도 했다.
"종일아 네가 보기에도 엄마가 바보 같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왜 이렇게 살아가나 이해 못 하겠지? 그럴 거야. 내가 생각해도 그러는데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본 너는 오죽하겠니."
"아니에요."
답답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엄마가 불쌍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바보처럼 살아온 거는 다 너희들 때문이었어. 너와 누나를 두고 이혼을 한다는 것은 엄마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어. 이혼 가정에서 자라게 될 고통을 너희에게 겪게 할 수 없었어. 그렇게 버티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흘러 버렸어. 다행히 너희가 잘 자라 주어 엄마는 참은 보람이 있단다. 누나도 시집갔으니 이제 네 말대로 해야 하나 싶다. 네 아버지가 순순히 이혼해 줄지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듯 말했지만 점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는 종일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잘하셨어요. 저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제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아가길 바래요. 우리 위해 오랜 세월 참고 살아왔는지 알아요. 처음 말씀 드리지만 엄마가 참아 주셔서 너무 고마워요. 어렸을 때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보며 엄마가 불쌍하면서도 집을 나가 버리면 어쩌나 두렵기도 했어요.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해 버릴까 불안하기도 했구요. 어찌 보면 저도 이기적이었나 봐요. 이제 다 이해해요. 앞으로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주사 바늘이 꽂힌 엄마의 손등이 보였다. 뭉툭하게 깎은 손톱과 잔주름이 여기저기 퍼져 있었다. 고단했던 엄마의 인생을 손이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그 손을 잡아 주고 싶었지만 종일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종일은 무툭툭한 아들이었다. 밖에서는 쾌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애교스럽게 행동했지만 집에 들어오면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 보니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몇 번 해본 적 없었고 따뜻하게 안아 준 적도 없었다. 주름진 손을 보며 선뜻 손이 나가지 않는 이유였다.
"종일아..."
금화가 가냘픈 목소리로 힘없이 종일을 불렀다.
"네. 엄마"
"..... 아, 아니다."
"할 말 있으면 해. 엄마~"
"아니야. 수액 다 맞은 거 같으니 일단 집으로 가자"
금화는 할 말이 더 있었지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혼하려고 결심했지만 한 편으로 두려웠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상철에게 나오는 연금을 분할해서 받을 수 있다고 들었지만 방법도 몰랐고, 집을 나오면 어디서 살아야 하는지 정해진 게 하나도 없었다. 상철이 순순히 이혼해 줄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말을 종일에게 하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들을 힘들게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과 자기 앞가름도 못하는 자신이 자존심도 상했다. 남편한테 당하고 사는 게 다 자기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았다. 이러든 저러든 비참함 만이 가슴속에 가득 찼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자 시간이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종일이 작은 방에 엄마를 눕혔다. 불을 끄고 나가려고 하자 '고맙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라며 금화가 울먹이며 말했다. 종일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가슴속을 날카로운 칼이 헤집는 듯 쓰라려 왔다. 왜 이런 상황이 생겨야 하는지 아버지만 원망스러웠다. '아니에요. 주무세요' 짧은 대답만 하며 그림자처럼 방을 빠져나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데 볼을 따고 뜨거운 게 흘러내렸다. 엄마가 불쌍했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미웠다. 새로운 곳에서 사시라고 방을 구해줄 돈도 없었고, 아버지에게 정신 차리고 사람답게 사라고 말하지도 못했다. 엄마가 바보 같고 불쌍하다고 하면서 자신도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다.
상철이 자지 않고 있었는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종일이 손으로 얼굴을 닦으며 아무 일 없는 듯 눈을 감았다.
"엄마는 좀 어떠냐?"
상철이 종일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갈비뼈가 부러졌데요..."
종일이 아버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날까롭게 무거운 거실의 공기를 찢으며 미세하게 떨렸다.
"그... 그러냐..."
"아버지, 엄마 놓아주세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게 뭐예요? 왜 흥분하면 감정 조절을 못하세요? 엄마가 무슨 잘못했다고 이러시냐고요?"
아버지가 무서워 한 번도 큰소리 내지 못하고 쥐 죽은 듯 살아온 종일이 소리 질렀다. 상철도 그런 종일의 행동에 당황했는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머... 머... 놓아주라고?"
"네. 이혼하세요. 엄마를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안아준 적 있어요?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요. 힘들게 하지는 말아야죠. 항상 무시하고 갈수록 폭력적이 되고. 이러다 더 큰일이 생길까 무서워요. 병원에서 갈비뼈 2개가 부러졌다고 했어요. 아버지 하는 걸로 봐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 같아요. 엄마가 착해서 그렇지 이렇게 맞고 사는 사람이 요즘 세상에 어디 있어요. 가정폭력으로 고소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시고 엄마 놓아주세요"
"이놈의 자식이 어디서 아버지한테 큰소리야! 내가 너를 이러라고 키웠냐? 자식이 부모 이혼 시키라고 있는 거냐?"
종일의 목소리가 커지자 따라서 상철의 목소리도 커졌다.
"자식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왜 그러겠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건 아니잖아요. 아버지는 본인이 고생해서 자식들 다 키우고 가정 일궜다고 하는데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닌가요? 그럴 거면 누나와 저를 왜 낳으셨어요? 우리가 낳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낳으셨냐고요? 앞으로는 그런 걸로 생색내지 마세요. 매번 똑같은 소리 듣는 것도 이젠 지겹 다구요"
종일의 소리는 상철의 소리를 덮었다.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아버지 말에 토 달아본 적 없었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조용히 살아왔다. 그런 종일이 목의 핏줄이 튀어나오게 소리 지르며 자신의 허물을 말하자 상철이 당황했다.
"아주 잘하는 짓이다. 이 놈의 자식이 아비가 그리 만만해 보이지! 나는 늙고 너는 다 컸다 이거지!"
"그 말이 아니에요!"
상철이 소리 지르며 종일의 뺨을 때렸다. 또 다른 손으론 주먹질을 했다. 종일이 날아오는 주먹을 잡았다.
"이 손 못 놔? 너도 네 엄마랑 똑같다. 내가 늙었다 생각 드니까 만만해 보이지?"
상철이 힘에 부치는지 식탁 의자를 들어 종일에게 던졌다.
'와장창~~~~'
종일이 맞지 않았지만 거실 장식장 유리가 박살 났다.
'제발~ 제발 그만들 해!'
작은 방 문이 열리며 간신히 버티고 서 있는 금화가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소리 질렀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흥분해 싸우던 둘이 금화의 외침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유리 잘 치워라. 다치지 않게"
상철이 미안 했던지 한 마디 하고는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엄마 괜찮아?"
종일은 비틀 거리며 서있는 금화가 걱정됐다.
"이제 그만해라. 아버지도 네 말 뜻을 이해했을 거야. 아까 말한 데로 할 테니......"
금화가 작은 방으로 들어가고 종일은 거실에 흩어진 유리 파편을 치웠다.
'앗~'
유리 조각에 베어 손에서 검붉은 피가 흘렀다. 쓰라렸다. 하얀색 화장지를 붉게 물들이는 베인 손 보다 가슴이 더 아팠다. 엄마가 불쌍했고 자신도 불쌍했다. 그리고 감정 조절 못하는 아버지도 불쌍했다. 앞으로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할지 생각하니 숨이 턱 막히며 가슴이 조여 왔다. 눈물만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다음 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