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기억 그리고 존재 3)
#3 [몽탁 마음 공작소] 효라빠 장편 소설
집에 돌아온 미아는 거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몽탁에서의 일이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의 일은 너무 충격적이라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거라 치지만, 수경의 눈을 통해 과거의 슬픈 기억을 봤으며 그게 다시 머릿속으로 들어왔다는 건 어떻게 설명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을 거라 생각했지만 소란과 헤어지기 전 마주친 눈동자에서도 소란의 슬픈 과거가 보인건 사라진 기억이 떠오르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 정신과를 가볼까 했지만 의사 앞에서 있는 그대로 말하면 진짜 정신 병자로 취급될 것 같았다. 다이어리의 사진을 꺼냈다. 남편과 아이가 보였다.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행복했던 시간은 많이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건 수경의 기억 속에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상했다. 슬펐지만 그 슬픔은 자신의 슬픔이 아니라 언니의 슬픔이었다. 교통사고 후 병원에서의 괴로운 모습과 장례식장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었던 자신의 모습은 언니의 눈을 통해 저장된 것이었다. 죽을 만큼의 크나큰 슬픔도 다른 사람을 통해 받아들이면 처음 겪었을 때의 애절함은 줄어드는 것인지 아니면 시간이 흘러 기억이 바래서 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슬픔의 정도가 다르 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미아는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봤다. 행복해 보였다. 지금의 모습과 달랐다.
'존재와 사라짐, 슬픔과 기억은 어떤 관계일까?'
행복이든 슬픔이든 존재하는 것은 사라진다. 영혼 하지 않다. 사라져야 빈 곳에 다시 들어온다. 행복만이 존재하길 바라겠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 행복은 당연히 있어야 하고 불행은 재수 없이 찾아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생은 반대일 수도 있다. 불행이 바탕에 깔려있고 가끔 오는 게 행복 일 수도 있다.
안방 화장대에 앉은 미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봤다. 30대 중반이지만 나름 생기 있고 20대라 해도 믿을 만큼 자신감 있는 모습이라 여겼는데 푸석푸석한 피부와 두피에서 올라오는 새치가 피곤하고 나이보다 먹어 보이게 만들었다. 갈색 눈동자에는 자신의 슬픈 기억이 다시 들여다 보였다. 수경의 눈에서 보았던 것보다 자세히 보였다. 어떻게 이런 현상이 생기는지 누구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음이 더욱 답답했다.
'눈을 통해 다른 사람의 슬픔을 볼 수 있는 걸까?'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한 적 없었고,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일이 자신에게 생긴 것이었다. 언니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상대방의 고통이 자신에게 옮겨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거울에 비친 갈색 눈동자에 과거의 아픔이 보이는 게 무섭기도 했다. 불안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 버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틀림없었다.
심란한 마음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고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언니, 나야. 통화 가능해?]
[응. 애들 재워서 괜찮아. 아까 봤는데 무슨 일이야?]
수경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미아의 상태에 대해 아무런 짐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수경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의 전화에 궁금증이 생겼다.
[아까 사진 정말 기억 안 나?]
[네가 몽탁에서 보여준 거?]
[응.]
[기억 안 나는데...]
[그럼 언니는 내가 결혼한 거 알아? 아이도 있었다는 것도 알고?]
[네가 결혼했다니? 뭔 생뚱맞은 소리야. 얘가 피곤하니까 헛소리를 다하네]
[......]
수경의 대답에 미아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언니는 여전히 기억을 하지 못했다. 추측이 맞았다. 미아는 눈동자를 통해 슬픔을 읽을 수 있었고 슬픔을 자신이 가져오면 상대방의 슬픔은 지워졌다. 어쩌면 지워졌다는 말보다 치유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기억이 없다는 건 고통도 없고 슬프지도 않을 테니까.
[수경아 무슨 일 있어?]
미아의 답이 없자 이상하게 여긴 수경이 물었다.
[언니!]
[왜?]
[내가 이상한 경험을 하고 있어]
[먼데?]
수경이 별일 아니겠지 하는 투로 가볍게 답했다.
[눈을 통해 그 사람의 아픔을 보는 거 같아...]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런 게 어딨어?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았니?]
수경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지 모르겠지만...... 언니가 믿을 거라 생각 안 해. 나도 지금 긴가 민가 하니까.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으면 너무 답답해서 말하는 거야. 아니다 다음에 얘기하자. 지금 말해봤자 언니뿐만 아니라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다음에 몽탁에 들려. 만나서 얘기하게]
[얘가 밤늦게 전화해서 이상한 소리 하네.]
[자구 내일 통화하자. 귀찮게 해서 미안해]
둘은 전화를 끊었다. 미아는 집에서 거울을 보며 있었던 일은 말하지 않았다. 얘기해 봤자 믿지 않을게 뻔했고 괜한 소리 한다는 말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평상시 같으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한두 시간 더 통화했겠지만 몸도 피곤하고 마음도 심란해 전화를 끊었다.
미아는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이 무척 그리워졌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 그녀에게 커피가 외로움을 달래 주었다. 특히 에스프레소를 좋아했다. 구수하게 로스팅한 원두를 곱게 그라인딩해 머신에서 나오는 진한 향과 맛을 품은 에스프레소 한 잔이면 세상의 모든 걸 가진 기분이었다. 마시기 전 커피 향부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잘 내린 에스프레소에서 아메리카노가 되고, 카페라테가 되고, 캐러멜 마키아또가 되는 것을 보면서 에스프레소는 달콤한 신의 선물인 커피의 시원이라고 여길 만큼 미아는 에스프레소를 좋아했다.
심란한 마음을 커피로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하자 불안한 마음이 더 들었다.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하느라 피곤한 거 말고는 특별하게 몸에 이상이 있지 않았는데 이런 현상이 생기자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남편과 아이를 보내며 받은 죽을듯한 고통 때문일까 하는 추측이 들기도 했지만 답은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
지치고 힘들어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그동안 있었던 일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소란의 눈동자도 떠오르고 소란의 슬픔은 뭘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다음 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