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에 의한, 나를 위한
어린 시절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참 많았다. 일하시는 부모님과 늘 학원을 여러 군데 다녔던 오빠가 없는 집에 오롯이 혼자 있었던 기억이 많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이 성향은 우르르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고작 한두 명의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가끔 만나 노는 것 외에는 늘 혼자였다. 중요한 건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고요한 집에서 내 몸집에 비해 커다란 내 책상에 앉아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상상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일기를 쓰기도 하고, 역시나 해 질 때는 노을 감상도 하고.
그 아이는 그대로 자라 여전히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혼자 있는 시간은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다. 1:1로 만나도 에너지를 소비하는 나는 한참을 친구와 즐겁게 떠들다가도 때 되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에너지가 방전된 채로 만남을 이어가는 것은 꽤나 곤욕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기 전에는 스스로 충분한 에너지를 만들고 나간다.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말이다. 만남의 시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해도 그 시간을 정말 즐겁게 마무리하기 위해, 그리고 다음 만남을 또 기대하기 위해, 적당한 시간에 헤어져야 한다. 무리해서 시간을 이어가면 즐거웠던 시간이 힘든 시간으로 끝나버린다. 그러면 그만큼 다음 만남은 한 칸 더 미뤄지게 되는 것이다.
어울림을 좋아하고 만남을 통해 에너지를 받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혼자서 뭐해요? 심심하지 않아요?라는 질문을 꼭 한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태껏 심심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심심한 게 이유가 된 적이 없었다. 심심한데, 심심해서, 심심하니까? 내가 질문하고 싶다. 왜 심심하세요?라고.
나는 집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thanks for coming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가만히 있을 때가 있다. 가만히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의 폭은 무궁무진하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처럼 머리로 글을 쓰며 생각을 정리한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일수도. 지나간 나의 후회일 수도. 망상의 나래일 수도 있다. 어느새 습관처럼 돼버려서 문득 그렇게 가만히 있을 때가 많다. 차분한 음악과 고요한 집과 무릎에는 내 묘연이 된 나의 고양이까지. 완벽한 시간이다.
몸으로 무엇을 꼭 해야만, 에너지를 발산해야만 심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혼자 가만히 있어도 충분히 재밌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혼자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심심한 거라면 나는 혼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던 시간이 없어서 심심함을 느껴보지 못했던 게 아닐까. 물론 어린 시절 혼자 있는 시간에는 심심하니까 그림을 그려보고 심심하니까 일기를 써보고. 이것저것 하다가 결국 가만히 노을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일까지 하다 보니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심심함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혼자 있는 시간은 나와 노는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군가를 배려할 필요도 없이 하고 싶은 것을 오롯이 즐기는 시간. 내가 나로서 가장 완벽한 시간. 나에겐 혼자 있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