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머무는 방과 열두 살의 아이
나는 서해바다 어느 부둣가 가까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엄마 아빠 손 잡고 어시장을 자주 갔었다. 덕분에 제철 생선, 해산물들을 다양하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회부터 해삼, 개불 같은 것들도 잘 먹어서 어른들이 놀라곤 했었다. 그래도 제일 좋아했던 건 왕새우 소금구이. 지금은 없어진 소래포구에 통나무집 식당이 있었는데 참 자주 갔었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서 맛있는 왕새우를 실컷 먹고 나오면 바닷가 구경도 하고 해 질 무렵에는 바다로 떨어지는 빨간 노을을 볼 수 있었다. 그 빨간 노을이, 온 세상을 빨갛게 물들이는 그 노을빛이 그렇게 신기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열두 살쯤 이사 갔던 새 아파트의 내 방을 아직도 기억한다. 서쪽으로 큰 창이 있던 내 방은 해질 무렵이 되면 어김없이 온 방안이 빠알간 빛으로 물들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있으면 TV 너머로 입구가 살짝 보이는 위치였는데 방이 물들기 시작하면 바로 입구 앞까지 빛이 떨어진다. 그럼 나는 '지금이구나' 싶어 방으로 달려간다. 그럼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안방도 오빠 방도 아닌 오로지 내 방에만. 나는 창문을 마주 보고 있는 침대 머리맡에 앉는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 빠알간 빛에 온 몸을 담근다. 낮에 햇빛이 강렬하고 뜨겁다면 늦은 오후 지는 해는 따사롭고 포근하다. 완전히 어둠이 올 때까지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빛 속에 앉아 있다가 누워 보기도 하고 그러다 따스한 빛에 잠시 잠들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아름다운 노을빛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나에겐 표현할 수 없는 감정과 순간의 느낌들이 예쁨을 넘어 어딘지 소름을 돋을 만큼 아름답고 찬란하게 다가왔다. 그때부터 시작된 나의 노을빛 사랑은 여전하다. 지금은 노을을 볼 때 어딘가 쓸쓸하기도 공허하기도 하지만 결국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된다. 매일 같이 노을이 머물다 가던 그 방이, 어김없이 몸을 담그던 열두 살의 내가 생각나서. 그래서 노을이 마냥 쓸쓸하고 슬프지 않다. 위로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가 된다.
어린 왕자 이야기 중에 어린 왕자가 사는 B612 행성에서는 노을을 원하는 만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작은 행성에서는 조금씩 각도를 옮겨 앉으면 계속해서 떨어지는 노을 볼 수 있다고. 어느 날은 어린 왕자가 마흔세 번을 보았다며 너무 슬플 땐 해 지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인간이 그럼 너는 그때 마흔세 번만큼 슬펐니?라고 물었지만 어린 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