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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숲 Sep 29. 2024

추억이 말을 걸어올 때

라디오 노래의말들 168화 후기


9/22 노래의말들 클로징 中


어떤 기억은 우리를 물끄러미 보며 침묵하고요. 

어떤 기억은 우릴 다그치고, 

어떤 기억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셋 중에 무엇을 추억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문득 혼자인 것 같고 유독 마음이 추운 날

추억은 우리를 이불처럼 덮어주는 것 같은데요. 

오늘 밤도 그런 날 꺼낼 담요 한 장이 되길 바라며, 

끝 곡은 조규찬 님의 '그날의 온기 보내드릴게요. 

내일에 지지 말고 노래의말들, 저는 김숲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숲입니다. 반갑습니다. 일요일 오후, 자주 가는 카페에 잠시 나와 후기를 쓰고 있습니다. 가을 날씨가 참 좋네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적당히 불고요. 역시 이런 날엔 맑은 하늘을 창문 너머로 보며 향긋한 커피를 마셔야 합니다. 집돌이의 기준에서 사실 카페에 가는 것도 외출이거든요. 집돌이의 공간은 실내/실외가 아니라 집안/집 밖으로 나뉘기 때문이죠. 저는 즐거운 외출 중입니다. 여러분은 주말에 좀 나가셨는지 궁금하네요.


168화는 '플레이리스트 듣는 마음' 코너로 함께했습니다. 기억과 추억에 대한 가사와 심리학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전 기억력이 엄청 안 좋아요. 사람 이름도 잘 못 외워서 민망한 상황도 많이 생겼고요. 갔던 식당과 카페를 처음 오는 것처럼 느끼는 재능 덕분에 아내에게 많이 혼났습니다. 어쩌면 '노래의말들'은  저의 부족한 기억력 때문에 생겼다고도 할 수 있죠. 노래를 아무리 들어도 가사를 못 외워서 가사를 프린트해 밑줄 그으면서 봤거든요. 덕분에 가사의 매력에 빠질 수 있었죠. 해피엔딩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걸 잘 기억 못 하는 건 아닌데요. 재미있는 이야기는 잘 기억합니다. 누구랑 누가 싸운 썰, 누가 한 웃긴 실수, 동경하는 이들의 감동적인 인생 역전 스토리 같은 것은 방금 들은 것처럼 술술 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늘 궁금했습니다. 과거 중 대체 어떤 것이 기억에 남는 것인가! 뇌도 나름대로 기준이 있을 텐데 말이죠. 


나 교수님께서는 이번에 '피크 앤드 법칙'을 소개해 주셨어요. 한 경험이 기억되는 방식에 관한 법칙인데요. 가장 감정적으로 동요했을 때의 느낌과 마지막 느낌이 전체 경험의 인상을 결정한다는 이야깁니다. 


바로 납득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긴 대화를 한 적이 있었거든요. 한참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자존심 상하는 한마디더라고요. 나쁜 얘기만 했던 건 절대 아니었는데, 그 한마디와 좋지 않은 기분만이 며칠 남아있었습니다. 피크 앤드 법칙을 좀 일찍 알았다면 마무리는 더 좋게 했을 텐데 말이죠. 


그런데 이건 '기억'에 대한 얘기잖아요? '추억'은 '기억'과 어떻게 다를까요? 컴퓨터를 잘 못하지만, 과거를 문서 파일이라고 하면 기억은 '저장', 추억은 '다른 이름으로 저장'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추억은 주어진다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추억으로 부를까의 문제인 거죠. 여러분이 생각하는 추억의 조건은 무엇인가요? 개인적인 추억의  조건 두 가지를 뽑아 봤습니다. 


첫째, 추억은 함께한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너무 당연한가요? 그런데 여기서 '함께한다'라는 뜻은 꼭 실제로 만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말하자면 등장인물 같은 개념인데요. 추억이라고 부를 시절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적어도 두 명이 출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혼자 끙끙 앓았던 짝사랑도 추억이 될 수 있지요. 제게는 혼자 새벽 라디오를 들었던 것도 추억입니다. 혼자 들었지만 DJ, 청취자 가족들과 '함께'했으니까요. 이렇게 생각하면 '나눌 대상이 있는 것'은 추억의 필수 조건이 아니겠네요. 나눌 대상이 없는 혼자만의 추억도 있습니다. 마음 서랍 어딘가에 넣어두고 가끔 꺼내보는 그런 추억이요.


둘째, 현재에 영향을 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새벽에 몰래 라디오를 들으며 행복해했던 추억이, 지금 제가 라디오를 진행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또 제 아이를 보면, 제가 행복했던 추억들을 아이와 같이 재현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엄마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던 추억이 좋아서, 아이와 함께할 겨울이 기대된달까요? 이상한 상상이지만, 누군가와 별을 함께 본 추억을 가진 이가 아무도 없었다면 인류가 로켓을 쏘아 올리는 사건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추억이란 생각보다 힘이 셉니다. 추억은 현재에 말을 걸어옵니다. 침묵하는 기억은 추억이라 할 수 없겠지요.


어쩌면 산다는 건 말야. 지금을 추억과 맞바꾸는 일.
- 양희은, 성시경 '늘 그대'


노력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기억된 몇 안 되는 가사 중 하나입니다. '지금을 추억과 맞바꾼다'라는 노랫말이 마음에 콕 박혔거든요. 가사를 처음 들었을 땐 슬펐습니다. 맞바꾼다니... 물릴 수 없는 계약이 이행된 것 같았어요. 한번 추억이 된 지금은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물론이죠. 당연합니다. 


그런데요. 어쩌면 산다는 건, '추억을 지금과 맞바꾸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신에게 가서 "여기 추억 드릴게요. 지금을 좀 주세요"라고 할 수 있달까요? '지금'을 '오늘의 의미'로 해석하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추억은 고통을 잠시 잊게 하는 진통제 이상이거든요. 


세상에 똑같은 추억은 하나도 없겠죠? 추억이 있는 사람은 그 특별한 추억을 재현할 소명을 받은 셈입니다. 그에게 '추억'은 말을 걸어옵니다. "나를 한 번 더 세상에 꺼내줘." 추억의 말에 순응한 사람들은 움직입니다. 소중한 추억을 다시 세상에 꺼내놓기 위해서 오늘을 살아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만의 추억이, 타인의 추억이 됩니다. 추억에서 탄생한 노래가, 다시 누군가의 추억이 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하루하루가 똑같다고 느껴지고, 내일이 기대되지 않을 때면, 추억의 부름에 귀를 닫은 건 아닌지 의심해 보려 합니다. 


여러분의 추억은 무어라 말하고 있나요?


[라디오 노래의말들 168화 방송 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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