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물에 이제야 이름을 붙여봅니다
명절 연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오늘은 특별하게 당신을 떠올립니다.
나의 친할머니이자, 내가 10살이 되는 무렵까지 우리 삼 남매를 돌보셨고, 우리가 할머니 집을 떠나 독립을 하고서부터는 주로 명절에 보았던, 외할머니와는 대화를 통해 유대감을 쌓았다면, 부대끼던 살결로 유대감을 쌓았던, 영원히 귀여웠던 당신에게.
당신은 어린 나이에 어느 시골 가문 맏며느리가 됩니다. 너무 어렸고, 배움의 기회는 없었으며, 고된 노동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시가 식구들은 엄격하고 고지식해서 당신을 존중해주지 못합니다. 당신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제대로 된 추모조차 할 수 없도록 했죠.
억울하고 화가 날 법도 한데 착한 심성을 가진 당신은 동네 친척 아이들이 배가 고파할 때마다 몰래 부엌을 내줍니다. 당신이 돌아가시고 나자 많은 친척 어른들이 그때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었던 거 아시나요.
무심한 자식들에게 때로는 상처를 받고, 술을 즐겨하던 남편의 초상을 치르고, 동네 사람들과 유치한 싸움을 하기도 하면서, 당신은 오랫동안 글씨를 읽지 못한 채로 그 시골집에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맞벌이로 형편이 좋지 않던 큰아들의 세 아이들 육아를 도맡게 되죠.
며느리가 늦은 시간에 퇴근하고 돌아와 아이들을 돌보기는 하지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육아하며 보냅니다. 무려 세 아이의 육아라니요. 9살, 5살, 2살 세 아이들의 다양한 나이만큼이나 챙겨야 할 것도 많습니다. 요즘 같으면 돌봄 노동에 지쳐 벌써 파업을 하고도 남았을 텐데, 당신은 늘 그래 왔듯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요즘 떠오르는 많은 심리학 용어들이 다 당신의 모습과 어울렸습니다.
때때로 번아웃이 온 듯 막내를 업고 마루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기도 했고, 치고받고 싸우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싸우면 죽어버리겠다며 운 적도 있습니다. 그땐 할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사람들은 이제야 당신의 증상에 이름을 붙여줍니다.
육아 우울증
늘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던 당신과 참 안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이보다 더 맞는 말이 없네요.
그때 누군가 당신의 증상을 알아봐 주고 공감해줬더라면, 당신은 조금 덜 힘들었을까요. 글씨를 읽을 수가 없어 전화 걸기를 손녀에게 부탁하던 당신의 참담한 마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 가족이 독립을 하고, 도시로 이사 간다고 마냥 좋아했던 그때, 당신은 우리를 배웅하며 마루에서 슬피 울었습니다. 자주 놀러 올 거라고 했던 약속이 얼마나 가벼운지 우리는 몰랐고 당신은 알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당신이 자주 전화를 해왔고 눈물 젖은 목소리로 손주들을 한 명씩 찾았습니다. 한참 후에 당신은 그때 TV에서 우리 또래의 아이가 나오면 우리가 생각나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지요. 우리도 할머니의 품을 깨끗이 잊은 건 아니었습니다. 특히 삼 남매 중 맏이였던 나는 포스트-할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었죠. 부모님이 귀가하는 밤까지 동생들의 밥을 챙겨줘야 했는데, 할머니가 자주 해주던 깨소금 간장계란밥을 자주 만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우리를 보고 싶어 할까 봐 우리를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조그만 사진첩에 넣어주기도 했습니다.
할머니에게 육아 스트레스가 컸던 만큼, 한순간에 우리를 떠나보낸 슬픔도 높은 파도처럼 당신을 덮쳤을 텐데, 가까이서 보지 못해 더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명절이나 제사가 있는 날에 할머니 댁을 방문하면 우리를 안고 볼을 비비고 너무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다 우리가 집을 나서면 마루에 앉아 퍽-퍽- 눈물을 흘렸어요.
정말 그땐 당신이 점점 약해져서 흘리는 눈물인 줄 알았습니다. 달리 붙여줄 이름이 생각나질 않았지요.
귀하게 키워준 손녀딸이 어른이 되고, 이제야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신은 참 멀리도 갔습니다. 당신이 떠난 후 짐을 정리하다가 우리가 선물했던 사진첩을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손으로 만지고, 입을 맞췄던지, 사진을 덮은 비닐에 지문자국이 한가득이었어요. 그제야 당신의 그리움, 우울함의 크기가 느껴져 한참 울었습니다.
이제야 시골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사업이 활성화되고, 이제야 우리는 그들의 서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이제야 손주들을 돌보던 할머니들의 돌봄 노동에 황혼육아라는 이름이 붙고, 나이 든 몸으로 손주를 돌본다는 것의 사회적 가치를 논하기 시작합니다.
배움도, 이름도 없던 시절 당신은 얼마나 답답하고 외로웠나요.
늘 우두커니 마루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던 당신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습니다. 이제야 당신의 눈물에 이름을 붙이고 깊게 공감해서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