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뮤지컬로 다시 만난, <베르테르>
아침 공기가 적당히 쌀쌀해진걸 보니 가을이 시작되었나 보다. 가을하면 감성인데, 코로나 때문에 회사와 집을 사이를 반복하고, 사람과 마주하는 일이 적어지다 보니 감성도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지난 일요일, 무심코 들어간 예매사이트에서 뮤지컬<베르테르>가 할인중이었다. 거기에 티켓 봉투도 예쁜 걸로 준다하고, 원하는 캐스팅에 예매 가능한 자리까지 완벽하다니! 이번 달 밖에 나가지 않아 지출이 적었다는 합리화가 빠르게 마쳐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8만 5천 원이 결제되어 있었다.
한해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무대 위를 오르고 내린다. 어떤 공연은 다시 돌아오고, 돌아오지 못한 공연들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20 주년을 맞이해 돌아온 뮤지컬<베르테르>의 작품의 힘이 더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라이선스(해외 작품의 판권을 사와서 하는 공연)일 것 같으나, 한국에서 제작한 창작 뮤지컬이다. 창작 작품이다 보니 시즌별로 달라지는 부분들이 있었고, 올해 우리가 공연장에서 만나는 버전은 해바라기를 메타포로 의상과 무대가 대대적으로 수정된 2013년 공연 버전이다.
우리가 베르테르를 짝사랑의 아이콘으로 익히 알고 있듯이, 스토리는 약혼자가 있는 롯데를 베르테르가 열렬히 짝사랑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짝사랑이 '짝사랑'이었을 지에 대해서는 책을 읽으면서는 그런 것 같았고, 뮤지컬을 보면서는 흔들리는 롯데의 마음이 느껴졌다.
1막에서는 베르테르와 롯데의 만남이 주요한 사건으로 그려진다. 베르테르는 여행 온 발하임의 광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광장에 인형극을 할 물건을 수레에 잔뜩 실어와 하녀와 함께 신나게 공연을 하는 롯데가 등장한다. 베르테르는 롯데의 인형극을 그림으로 그리고, 롯데는 인형극의 스토리만 쫓는 사람들과 달리 감성적인 베르테르에게 그녀는 친밀감을 느낀다.
그렇게 끝날 것 같은 두 사람의 관계는 베르테르가 롯데를 그린 그림을 선물하고, 롯데가 그 보답으로 책을 선물하며 친구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발하임을 돌아보며 관계를 쌓아간다. 그렇게 깊어지는 감정 속에서 베르테르가 롯데에게 고백을 하려던 그날, 롯데의 약혼자 알베르트가 발하임으로 돌아온다. 롯데의 약혼 소식에 충격에 빠진 베르테르는 발하임을 떠난다.
이와 달리 소설에서는 두 사람의 만남의 장소와 베르테르가 롯데의 약혼 소식을 알게 되는 시기가 다르다. 베르테르는 동네에서 열리는 무도회로 가는 마차에서 롯데를 처음 만난다. 곧 사랑스러운 여자가 마차에 탈 것이고, 약혼자가 있으니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
2막에서는 발하임을 떠났던 베르테르가 돌아와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베르테르는 자신의 감정을 피할 것이 아니라 부딪히기로 마음먹고 돌아왔지만, 하필 그날이 롯데와 알베르트의 결혼식날이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맞이한 그의 이성의 끈은 풀려버리고, 그는 우리가 아는 그 결말을 맞이한다.
소설에서도 베르테르는 마음을 잡으려 발하임을 떠난다. 그곳에서 일자리도 잡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일은 그의 바람대로 잘 풀리지 않고, 그 와중에 롯데와 알베르트의 결혼 소식을 듣고, 결혼 소식을 알리지 않은 알베르트에게 배신감과 분노, 그리고 롯데만큼 자신을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줄 사람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발하임으로 돌아온다.
아마도 뮤지컬과 소설을 보면서 가장 평이 갈리는 대화 주제는 ‘그래서 롯데는 베르테르를 사랑했을까’이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소설에서는 글쎄, 뮤지컬에서는 그녀의 달라진 상황에서의 흔들림이 베르테르에게 마음을 기울이게 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롯데는 선을 넘으려는 베르테르에게 계속해서 선을 잊지 말라는 경고를 준다. 알베르트가 거슬릴만한 장난치려는 베르테르에게 경고를 하고, 그에게 선물을 보낼 때에도 알베르트 이름으로 보낸다.
반면 뮤지컬 속 롯데는 그 시대의 인싸가 있었다면 저랬겠구나 싶은 캐릭터다. 광장에서 인형극을 하면서는 사방팔방의 사람들에게 인형을 나눠주며 참여시키고, 말장난 그리고 캐시와 깔깔거리는 대화는 최애 취미다. 그러던 그녀가 이성으로 중무장한 알베르트와 결혼을 했다. 알베르트 부인의 삶은 이전의 롯데의 삶과는 달랐을 것이다. 인형극도, 캐시와의 깔깔거림도 그녀의 달라진 위치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직접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답변으로 확인한다. 그런 혼란 속에서 갑작스런 베르테르의 방문은 롯데를 미혼 시절로 되돌려 놓는다. 그랬기에 알베르트 부인이 아닌 롯데라 불러달라는 그녀의 말에 이성을 놓아버린 베르테르의 입술을 뒤늦게 피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롯데는 베르테르와 함께 흔들리고, 알베르트만 자신의 자리에서 중심을 잡고 서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떠올리면 모두가 베르테르와 롯데 두 사람만을 기억하지만, 롯데의 약혼자이자 남편인 알베르트만한 남자가 없다. 자칫 악역이 될 수밖에 없는 포지션에 있는 그는 악역이 아닌 대인배이자 이성의 표본으로 그려진다.
소설 속에서 그는 질투에 사로잡히기 전인 베르테르에게도 롯데에 대한 마음을 인정받는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롯데에게 입을 맞추지 않고, 그녀를 자랑스러워하며 모두에게 그녀가 사랑받기를 바란다. 뮤지컬 속 알베르트 역시도 롯데에 대한 마음만큼은 소설에 지지 않는다. 롯데의 취미를 아는 그는 그녀가 온실에 키울 수 있도록 꽃씨를 보내고, 여행에서 돌아왔을 땐 책을 내민다. 거기에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롯데 곁을 지켜준 사람들의 선물도 잊지 않았다.
그렇다면 베르테르의 행동에 대한 그의 반응은 어땠을까. 소설 속에서 알베르트는 베르테르의 마음을 눈치 채지만 롯데를 믿는다. 그는 두 사람의 관계에 침묵으로 대응하고, 그 침묵의 의미를 아는 롯데도 그의 믿음에 부응하고자 노력한다. 뮤지컬 속 알베르트는 소설보다 적극적으로 그에게 불쾌함을 표한다. 그의 마음을 알고 있지만 그 역시도 롯데가 좋아하는 친구이기에 그를 젠틀하게 대했으나, 베르테르가 이성을 잃고 자신에게 총까지 겨누자 자신이 얼마나 더 선량하고 배려하는지를 묻는다.
소설에서나 뮤지컬에서나 알베르트는 건실하고 자상한 남편으로 그려진다. 그렇기에 베르테르의 마음은 더 불이 났을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여자와 함께하는 것도 부러운데, 성품도 평판도 완벽한 사람. 그가 부족한 사람이었다면 당장이라도 고백을 했겠지만, 자신만 빠지면 완벽한 그림 앞에서 베르테르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확히 세보지는 않아서 몇 번째 관람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 다섯 번은 보지 않았을까 싶다. 최고의 캐스팅 조합을 꼽자면 엄기준-전미도-양준모 배우의 조합이 가장 상상하던 뮤지컬<베르테르>의 모습을 무대에서 보았던 것 같다. 베르테르 역은 엄기준 배우가 이전 트위터 아이디로 활용할 만큼 애정하는 역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배우가 사랑하는 역할을 무대 위에서 소화하는 것을 관람하는 것은 관객이 누릴 수 있는 큰 행운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이미 여러 번 관람한 공연이기에 가을이니 눈물 좀 뽑고 오겠다는 장난스런 카톡을 친구들과 주고받으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말은 현실이 되어 막이 오르고 시작되는 베르테르의 장례실부터 눈물이 터졌고, 거의 어제 차인 사람마냥 5열에서 오열하며 뱉은 말을 지켜낼 수 있었다.
코로나 블루인지, 아니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 지가 너무 오래되어선지 마음이 허하게 느껴지는 요즘이었다. 거기에 억지로 웃으려기보다는 공연을 관람한 세 시간 동안 눈물로 감정을 털어내고 나오니 되려 마음이 편해졌다. 다시 새로운 마음을 채울 수 있을 것처럼. 가을밤 왜인지 모르는 허전함이 든다면, 비워진 마음을 억지로 채우기보단 베르테르와 함께 마음을 비우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