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층에서

아파트 저층에서 사는 즐거움.

by 김성수


아파트에서 오래 살다 보니 높은 층에서도, 낮은 층에서도 살아보았다. 바쁘게 살다 보니 아파트라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러려니 살다가 이제 마지막 경유지로 새로 지은 아파트 4층에 자리 잡았다. 4자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4자가 두번이나 겹치는 404호에, 이사비도 할인해 주는 손 있는 날을 골라서 이사를 했다. 저층이 값도 좀 싸고, 승강기가 고장이라도 나면 계단을 오르기도 쉽지 않은 나이고, 비상탈출도 손쉬울 것이라는 요량도 있었다.


아침 운동 삼아 계단을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가 보았다. 20층이라 초고층은 아니더라도 눈앞에 펼쳐진 전망이 유별나게 좋았다. 저층에서 눈앞의 세상만 보고 살다가 눈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좋아졌을 것이다. 여자 코는 한 치만 높아도 세계역사가 바뀐다고 했고, 하이힐만 신어도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니 높은 것은 좋은 것이다. 남자는 뒤꿈치만 들어도 기가 산다고 했는데 산에라도 오르면 그야말로 기고만장(氣高萬丈)할 일이다. 이래서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에 오르고, 아파트는 높은 층이 인기가 좋구나. 순간 스치는 생각이 아파트만 높아도 이리 기분이 좋은데 자신의 지위가 높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고위층을 지내 본 경험이 없어 잘 알 수는 없지만 고층아파트에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고층 아파트야 돈만 있으면 되지만 사회적인 고위층이야 어지간해서는 오르기가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고층아파트에서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경관이야 높은 산이나 비행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고위층은 산도 비행기도 마음대로 할 수 있잖은가? 사람이 기를 쓰고 경쟁에 이겨 출세하려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出世- 속세를 떠나는 것도 출세이지만 세상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빛나는 출세이다. 지위가 낮아서야 제아무리 훌륭한 인품과 인격을 갖추었던들 알아주지 않으니 옛날부터 모든 것을 제쳐두고 출세에 목매는 세태를 탓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보니 하필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이제 방 안에서 하루 종일 보낼 때가 많다. 출세와 고위층이 좋은 건 알지만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되었다. ‘여우의 신 포도’가 아니라 이제는 신 포도마저 입맛을 잃은 지 오래이다. 여우가 포도를 포기한 것은 높이 뛰었다 떨어질 때 아플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올라갈 생각만 하는 일이 많다. 높이 올라갈수록 떨어질 때 더 아프다는 사실을 모르면 여우만도 못한 인간이다. 다행히 정상을 정복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내려와야 한다. 그런데 그걸 생각하지 못하고 그 자리가 곧 자신이요,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高位고위란 자신이 아니라 자리일 뿐이다. 자리일 뿐이기에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고, 그러기에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에베레스트 정상이 내 것이 아니듯이 고위는 내 것이 아니다. 산을 정복했노라고 호들갑이지만 정복이 아니라 잠깐 올라서 본 것뿐이듯이 자리도 그렇다.


나야 그냥 고층에서 내려오면 된다. 늙으면 애써 자리를 감당해야 할 부담이 없어서 좋다. 저층에서 살면 승강기가 만원이라도, 고장 나도, 꾸물거려도, 신문배달 택배 청소아줌마가 승강기를 독점해도 좋다. 심지어는 불이 나더라도 그 위험이 적다.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발쉽게 밖으로 나갈 수 있으니 땅도 자주 밟아보고, 대인관계도 더 많고, 운동할 기회도 많다. 방 안에서도 길 위에 사람들도 가까이 볼 수 있고, 나무도 눈앞에서 볼 수 있고, 새가 나뭇가지에서 까부는 것도 볼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잠자리도 나비도 창으로 날아든다. 고위층에 있으면 웬만해서는 내려오기가 싫고, 그러다 보면 밖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대인활동이 적고, 고독해지기 쉽다. 화분의 꽃도 고층에서는 잘 자라지 못하는데 산소가 적어서 그렇다면 사람에게도 그닥 좋지 않을 것 같다. 바람은 더 잘 불겠지만 지상의 소음은 고층이 더 크게 들린다. 도둑은 덜 들겠지만 불이라도 난다면 난감한 일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내려오다 보니 저층에 사는 복이 만만치 않다. 거기다가 스스로를 낮추는 원리까지 터득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저층이다. 그리고 장차 흙에 돌아갈 날을 생각하면 미리 흙을 가까이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건 아니더라도 사람은 흙냄새를 맡아야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농경민족의 편견일까? 애들도 흙바닥에서 놀아야 아토피도 적다고 한다. 혹시라도 병원에 급히 갈 일이 생겨도 저층이 빠르고, 병원에 갈 새도 없이 죽는다면 마누라 고생도 덜할 것이 아닌가?

늙어서는 역시 낮은 곳에서 살고,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어차피 죽어서도 낮은 곳으로 가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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