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고통마저 아름답게 한다.
내가 시골 국민학교에 다닐 때에는 흙교실이 있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어렵지만 흙교실은 이름 그대로 바닥부터 맨질맨질한 흙바닥이었다. 그래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흙묻은 상채기가 나고 더 아팠다. 양은 도시락도 없어 사발 도시락을 먹다가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울던 아이도 있었다. 청소시간이면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먼저 땅바닥에 물을 뿌려야 했다. 칠판에서 떨어진 백묵가루는 그에 비하면 귀한 먼지였다. 흙바닥에 있는 책상 걸상은 당연히 흙먼지 투성이었다. 노래기를 비롯한 벌레들이 바닥과 벽을 누비고 다녀도 그러려니 했다. 기워 신은 고무신을 벗지 않아도 되니 신발장같은 것은 아예 없었다. 바람벽도 역시 흙으로 발라져 있었고, 그나마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찬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천장은 당연히 없고, 지붕은 볏짚을 엮어 덮었다. 늦가을이면 초가지붕을 덮는 것은 큰 일이어서 애들이 집에서 볏짚단을 하나씩을 들고 와도 그걸 엮어서 지붕을 덮는 일은 마음 좋은 학부모들이 노력봉사를 해 주어야 했다. 어떤 해는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건너뛰기도 해서 지붕이 썩어 잿빛일 때도 있었다.
누구나 학년이 올라가기를 바라지만 흙교실에서는 특히 고학년을 부러워했다. 어서 4학년이나 돼야 고급스런 목조교실로 승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무실을 가기란 겁나는 일이었지만 나무바닥을 밟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면 일도 없이 살금살금 목조교실로 진출해 보기도 했었다. 운동장 조회나 전체 체조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짧은 다리로 뒷켠에서 운동장까지 불이나게 달려가지 않으면 지각이다. 운동장이 바로 코앞이라 느긋하게 걸어나오는 6학년이 한없이 어른스러워 보였다. 요즈음 같으면 어린 애들을 혹사시킨다고 할 법하지만 그때는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그런 혹사를 3년 동안 꼼짝없이 당했지만 우리가 6학년이 되니 사연 많던 흙교실은 허물어지고 더 멋있는 교실이 지어져 흙교실의 애증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갓 입학했을 때에는 그 알량한 흙교실마저 충분치 못했던지 운동장에서 수업을 했던 기억도 있다. 그때는 애들이 많아서 오전 오후반을 나누어 수업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흙교실이라도 차지하였으니 감지덕지였다. 그런 와중에 가끔 학교 솔밭을 차지하는 행운도 있었다. 학교 동쪽에는 동산이라 부르는 조그만 솔밭이 있었다. 거기에는 솔 그늘도 있고 여기저기 긴 통나무를 반으로 잘라 만든 긴 의자도 있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도 힐링의 산림교실이었다.
그나마 수업이라도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었지만 50년대만 해도 민둥산이 많았고, 그나마 나무라고는 천덕꾸러기 소나무, 아카시아 나무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소나무에는 손가락만 한 송충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중국에서 황사가 오면 미세먼지에 송충이 숨구멍이 막혀서 죽는다고 했지만 그때는 그 흔한 황사마저 한 해에 서너 번이면 끝이었다. 송홧가루마저 끝나고 나면 하늘은 늘 화창했고, 물로 닦은 것처럼 깨끗했다. 지금은 그런 하늘을 보기가 그야말로 별따기이다. 그때는 농약, 살충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시대라 우리들은 수업을 전폐하고 산으로 가서 송충이를 잡아야 했다. 나무집게로 송충이를 잡아 깡통을 가득 다 채워서 검사를 맡아야 하산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에는 송충이가 끔찍이도 많았다. 그 많던 송충이가 어디 갔는지 신기할 정도이다. 민둥산이 많으니 자연히 홍수 피해가 잦았다. 나무를 심자니 하세월이어서 우선 민둥산에 성장이 빠른 아카시아를 심고, 그마저도 다급해서 풀씨를 뿌려서 토사유출을 막는 사방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풀씨를 채집하는 데에는 어린 학생들이 가장 만만했다. 그래서 수업 대신에 야산에 가서 열심히 풀씨를 따서 검사를 맡아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풀씨를 따오는 것이 숙제여서 등굣길에는 풀씨 보따리를 들기도 했다. 가끔은 모심기 노력봉사도 했었다. 아직 모 심을 솜씨가 안 되니 논에 들어가서 모침을 날라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그런데 그런 일들이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보다 더 기다려지기도 했다. 수업 빼먹기를 그렇게 밥먹듯했어도 나라의 일꾼으로 훌륭히 키워낸 것을 보면 코로나 수업결손을 더 큰 재난으로 걱정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싶다. 교육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그때는 보릿고개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였다. 형편이 어려운 애들에게는 학교 숙직실 부엌에서 옥수수 죽을 쑤어 나누어 주고, 우윳가루를 배급하기도 했다. 그것으로 옥수수 빵이나 우유를 과자처럼 쪄서 점심을 먹는 애들이 부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가난한 구호대상자였던 친구들이 줄을 서서 옥수수죽을 얻어먹고, 우윳가루 배급 받을 때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불편했던 흙교실, 징그러웠던 송충이 잡기, 따가웠던 풀씨 채집, 배고파서 먹었던 옥수수죽- 결코 아름다울 수 없던 일들이 지금은 그리운 추억이 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것이 좋아서 일어나는 추억이라기보다는 어렸을 때를 향한 막연한 그리움이리라. 지금은 살기 좋아진 여유에서 나오는 호사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보릿고개를 없애 준 위대한 지도자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반 세기가 지나가버린 지금까지도 그때의 통치방식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하거나 그것을 빌미로 지금의 정치를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흙교실, 송충이잡기, 풀씨채집이 지금 유효한 것이 아니듯이 그때의 통치방식이 지금에도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과거를 그리워하는 정에 가려 추억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은 기억의 왜곡이거나 시대착오이다. 그것은 아토피가 무서워 흙교실로 다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지금 현대식 교실에서 공부하는 어린 학생들이 흙교실에서 공부했던 우리들보다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까지도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배고팠던 그때가 배부른 지금보다 더 행복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제는'행복은 먹고사는 문제보다는 가치 있는 삶'에 달려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