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무신론의 무책임과 종교의 독선을 조화시킬 수 있다.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문 중의 하나는 신의 존재일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던 의문이 조금씩 해결되어 가고 있지만 이에 대한 의문은 오히려 점점 커져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신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점차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이다. 무신론이 점차 확산되는 추세는 종교의 위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도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종교적 믿음으로 유지되었던 전통적 윤리도덕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곧 사회질서의 혼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종교는 인간사회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 힘을 얻기도 한다. 전통적 종교로서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겠지만 신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위한 종교’가 가능하다면 역설적이게도 종교 자신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면 전통적 종교는 어차피 위험에 빠져 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일부 종교가 보이고 있는 행태를 보면 스스로 곤경을 자초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이 서로 믿음이 없다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는 나름대로의 믿음을 ‘신념’이라고 한다. 신념이 서로 간의 믿음으로 소통될 때 그것은 ‘신뢰’라고 한다. 신뢰가 쌓인 가운데 체계적이고 초인간적인 세계까지 이르렀다면 ‘신앙’이라고 하고, 그런 신앙이 더 조직적이고 신비적으로 내세를 지향한 것을 우리의 ‘종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인간의 신념,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무신론이고, 절대자의 신비와 내세를 믿는 것이 유신론이다. 무신론이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장점이 있지만 불완전한 인간이 스스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그 한계가 분명하다. 인간이 자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역사와 문화를 영속시켜야 할 존재라면 항구적인 가치관이 결여된 무신론은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무신론의 그러한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유신론이라고 해도 인간적 현실을 무시하고, 내세만을 추구한다면 인간의 존재 가치가 너무 초라해진다. 무책임하고 자학적인 한계에서도 때로는 유신론과 무신론이 대립하면서, 혹은 양자가 공존하면서 역사는 진행되어 왔다. 양자가 대립된다면 당장 서로 간의 신뢰가 서지 않을 것이고, 신앙도 달라질 것이고, 종교도 일치할 수 없을 것이니 이러한 사회가 정상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무신론과 유신론의 절충과 공존은 끊임없이 추구되어야 할 인류역사의 과제이다.
이를 위하여 신앙과 종교에 대해서 차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개 양자는 구별 없이 통용되기도 하지만 종교는 내세를 전제하고, 신앙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것 같다. 信仰(신앙)이란 한자로 풀이하면 ‘힘 있는 자에 대한 인간의 복종과 믿음의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이란 두 글자에 亻이 들어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와 의지와 행위를 강조한 것이다. 인간의 한계로 신에 의지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신념과 신뢰와 실천으로 인간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또한 신앙이 아닐까 한다. 이에 비하여 종교는 오직 절대자의 전지전능한 권위를 믿는 강력한 조직체이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종교’라는 용어는 근대에 영어 Religion을 번역한 말이다. Religion은 원래 종교인 동시에 ‘신앙’을 포함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우리의 ‘종교’는 인간적인 의지인 ‘신앙’을 소홀히 하고, 신비에만 집착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일부 기독교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사랑은 젖혀두고 맹신적인 믿음과 분별없는 독선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이 유가의 실천윤리를 잃어버리고 이론적인 성리학에 빠져 역사를 망쳤던 전철을 밟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 우리 ‘종교’의 과제는 본래 가지고 있었던 ‘신앙’의 정신을 살리는 대신 맹목적이고, 편협한 신비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종교 자신은 물론 유신론과 무신론의 한계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가사상은 강력한 사회윤리 철학이면서도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교라기보다는 신앙에 가까운 것이다. 유가사상은 현실주의, 인본주의이면서도 인간이 필요로 하는 항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무신론처럼 무책임하지도 않고, 유신론처럼 맹목적이거나 자학적이지도 않다. 물론 편벽된 성리학의 역사도 있었지만 이성적인 유가사상을 전통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면 무책임한 무신론자보다 맹신적인 종교의 폐해가 훨씬 크다는 생각이다. 무신론은 현실을 존중하지만 종교는 현실을 외면하고 신비주의에 흘러 사회는 물론 종교 스스로를 위험하게 하고 있다. 종교가 사회적 역할을 포기한 채 일방적으로 내세를 강요하여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기보다는 유가사상과 같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원용한다면 지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불교와 천주교는 이미 유연하고 다양한 신앙적인 내세관을 수용하여 종교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 다수의 개신교가 현실을 도외시한 채 아직도 독선적이고 편협한 ‘믿음 영생, 불신 지옥’만을 고집하고, 사회는 어찌 되든 막무가내 신앙의 자유만 내세운다면 분별없는 이기적 집단이 아닐 수 없다. 종교가 사회의 소금은커녕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독선에 빠져 사회의 위기를 재촉한다면 양식 있는 국민은 등을 돌릴 것이고, 내세의 하느님도 그것을 원치 않을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