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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Oct 04. 2020

뭣이 중헌디? 2

일의 경중과 선후를 구분할 줄 아는 지혜.

  식견은 짧고, 국론의 분열은 심해서 시국에 관한 말을 삼가고 싶지만 세상인심이 하도 수상해서 참지 못하고 가벼이 붓을 들었습니다. 누구 편 들자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 국민과 나라에 소중한 것인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사람의 죽음도 여러 가지이지만 여러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면 희생적인 죽음이요, 이러한 죽음을 우리는 의사(義死)라 하고, 그런 사람을 義士라 하여 기억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은 전사(戰死)는 대표적인 의사이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위급한 상황에 빠진 다른 사람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사람도 義士라 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의로운 행동이므로 사회에서, 국가에서 응분의 대우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고 자연재해나 사고로 죽은 것을 객사(客死), 사고사(事故死)라고 한다.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었으니 형편에 따라서 사회의 책임이나 동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병사(病死)나 횡사(橫死)라고 하면 질병이나 자신의 과오로 죽은 경우로 사회에 어떤 특별한 가치나 보상도 없을 것이다. 

  요즈음 한 공무원의 죽음이 나라를 흔들고 있다. 공무수행 중이었다고는 하나 사건 경위도 분명하지 않고, 이름도 성도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떳떳하게 드러낼 의사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 죽음의 내력에 대해서 상세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만약 본의 아니게 바다에 빠졌다가 죽었다면 사고사일 것이고, 월북할 의도로 탈출했다가 죽었다면 횡사일 것이다. 사고사라면 동정을 받을 수는 있어도 월북을 시도했다면 동정은커녕 공무원으로서 범죄에 해당할 것이다. 가족이나 야당 쪽에서는 사고사로 생각하고 싶을 것이고, 정부의 발표대로라면 횡사에 불과하다. 그러니 어느 경우라도 국가에서 의사처럼 나서야 할 일은 아닐 것이지만 상대가 북한이니 단순한 객사나 횡사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한 공무원의 사고나 횡사로 하여 나라가 온통 혼란스러울 이유는 없는 일이다. 3백이 넘는 세월호의 어린 생명은 거침없이 사고사라고 단정하던 사람들이 이름 모를 한 공무원의 사고사나 횡사에 대해서 유난스럽게 호들갑을 떨고 난리를 치는 건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로 보인다. 일부 철부지들은 당장 북한에 선전포고라도 해야 할 듯이 목청을 높인다. 

  한 공무원의 사고사나 횡사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고, 그렇게 공 들여왔던 남북관계나 전략체계를 일시에 허물어버린다면 크게 어리석은 짓이다. 그들은 소리 높여 정부의 무능과 친북정책을 질타하지만 북한은 그리 쉽게 적대국으로 대할 수 없는 상대이다. 더구나 북에서 전례 없이 김정은의 이름으로 정중히 사과를 표명한 마당에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것이 외교이다. 물론 개인의 생명도 소중하지만 국민과 나라와 민족의 안전과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소중한 생명을 바쳐 사회와 나라를 구한 義士도 있는데 하물며 한 국민의 사고사, 횡사와 민족의 장래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설령 소문대로 북한에게 총살당하고 시신이 불태워졌다고 해도 그것으로 당장 전쟁을 벌인다면 모기 보고 칼을 빼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짓이다. 진정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정부와 국민이라면 아무리 원수 같은 북한이지만 그들은 결국 우리의 동포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경에서의 우발적인 사건에 대해서 정부에서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북을 포용해야 할 정부에서 사나흘 동안에 그렇게 쉽게 처리할 문제는 아니었다. 대통령은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느냐고 다그치지만 문대통령의 성향으로 보아서 그 시간에 특급보고도 마다한 채 청와대에서 올림머리를 매만지거나 한가하게 연속극을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랏일이 그렇게 쉽다고 생각하니까 아무라도 대통령을 한다고 나서는 것이다. 북한이 저지른 만행 때문에 우리 국민들이 희생당한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때마다 우리가 칼을 빼들었다면 우리는 분단 내내 전쟁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라이언일병 구하기’와 같이 한 명의 낙오자를 위해서 수많은 희생을 불사하는 미담을 들어서 이번 사건을 질타하는 사람도 있다. 당장 북한을 응징하지 못하는 대통령을 무능한 군통수권자라고 꾸짖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 공무원은 라이언 일병도 아니고, 나라를 위해서 바다에 뛰어든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때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고에 대해서 전쟁이라도 벌여야 한다는 말인가? 군주제에 익숙해 왔던 우리는 서양 사람들처럼 생명을 존중하는 의식이 부족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부러워마지않는 서구 사람들의 목숨 구하는 이야기들이 흥미 있는 미담일지는 몰라도 현실적인 성공담은 아닐 것이다. 이기주의자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한 사람의 사고자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르는 것은 현명한 대처가 아닐 것이다. 이번 사건과 비슷했던 일이 불과 십여 년 전에 있었던 박왕자 피살 사건이다. 그때도 정부에서는 별로 할 것이 없었다. 그저 금강산 관광을 중단하는 정도였다. 그 결과로 북한도 손실이 컸지만 우리도 물리적인 손실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북한과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왜 이리 요란스러운지 모르겠다. 정부에서 대처에 미숙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사건으로 정부를 무능과 종북주의로 몰아붙이는 짓은 일부 정치꾼들에게 기만당했거나 실제로 생각이 짧은 사람들이 아닐까?  

  옛날 같으면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서 의문의 여지도 없이 개인은 사회와 나라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우리 교육의 최대 가치는 진충보국(盡忠報國)이었다. 개인의 생명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희생해야 하는 것이었다. 턱없이 안중근 의사를 빌어 망신을 당한 철없는 여당 국회의원도 있었지만  한 사람의 의문사를 마치 안 의사가 처형당한 것처럼 전쟁까지 불사한다고 나댄다면 일의 경중을 모르는 짓이다.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많을 듯하지만 역사를 지켜본 바로는 현 정부는 과거의 정권보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나름 노력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정부의 시행착오에 집착하는 일도 많지만 흠집없는 정권은 없는 법이고, 나라를 위하는 열정과 진정성만큼은 역대 어느 정권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라의 형편이 여의치 못한 것이 모두 정부의 탓인 것처럼 아우성이지만 일찍이 지금처럼 국제정세나 시국이 어려웠던 시대가 있었던가? 지금처럼 정부비판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가짜뉴스가 판을 치던 시대가 또 있었던가? 나라가 어려울수록 국민의 성숙한 격려와 협조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결국 소중한 내 나라인데 일부 국민들이 하는 짓을 보면 나라가 망하는 꼴을 손꼽아 고대하는 심술쟁이들 같아서 참으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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