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수 Sep 30. 2020

노인과 死(죽음)

노인은 死(죽기)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는 것은 어김없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지금까지 한결같이 죽지 않을 궁리를 해왔지만 태어나기만 하고 죽지 않는다면 인류는 스스로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살기 위해서라도 ‘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명제는 진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니 조물주는 전쟁과 질병을 내리고, 그것도 안 되니 자연재해를 더 가혹하게 내리는 것입니다. 삶과 함께 죽음은 사람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였고, 인류역사라는 것이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또한 이것입니다. 물론 수많은 해결방법이 끊임없이 제시되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자신의 죽음에 그 해결방안을 만족스럽게 적용시킨 사람은 아주 드물 것 같습니다. 설령 죽음의 문제를 해결, 극복했노라고 선언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어렵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성공적인 인생이란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년에게는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것, 더 쉽게 말하면 잘 죽는 것이 관건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리 출세를 하고, 무병장수에 만족하게 살았다고 자신하더라도 죽는 순간이 불행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것은 관 뚜껑을 덮을 때 결정된다는 말이 있듯이 적어도 노년에게는 인생의 성패가 사는 것에 달려있지 않고, 죽는 것에 달려있다는 생각입니다.   

  生을 글자의 뜻으로 말하면 상형성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땅 위에서 식물이 돋아나는 모양’을 본 딴 글자라고 합니다.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식물뿐 아니라 땅 위에서 사는 동물도,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도 모두 이 生자에 들어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땅, 흙에서 나왔으니 유한한 생명체로서는 원래의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 이치를 나타낸 글자가 死자입니다. 死자는 사람(匕=人)이 죽어서 뼈와 살이 분리되는 것(歹)을 의미하므로 원래 사람에게만 쓸 수 있는 글자입니다. 그래서 식물이 죽었을 때는 枯(고), 짐승이 죽었을 때는 斃(폐)라 하여 사람의 死와 구별합니다. 生은 다른 생명체와 같이 자연현상 중의 하나이지만, 생을 마친 死는 다른 생명체와는 구별되는, 사람만의 다른 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치가 거기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死는 사람만의 본질이요, 권리요, 존엄입니다. 동시에 이것이 또한 사람만의 운명이요, 멍에이기도 합니다. 生死는 모든 생명체가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生이란 것은 생명체라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고, 死는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공자는 '사람의 도리를 하지 못하면 死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老子는 ‘강한 것을 내세우는 자는 死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죽었다고 다 死가 아니라 사람답게 살았어야 비로소 死라고 할 수 있다 하였으니,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누구나 다 死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답게 살아야 비로소 떳떳하게 죽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사람은 스스로 모든 지상의 생명체 중에서 조물주의 선택을 받은 유일한 존재라고 자부합니다. 그 선택이 영광된 것이었는지 비운이었는지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른 생명체하고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구별은 태어나는 生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는 死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태어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차피 죽어야 할 인생을 오로지 ‘살기 위해 사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죽기 위해 죽는다’고 한다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 죽는’ 종교적 신앙도 있지만 인생이 과소평가된 면이 있어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좀 역설적이지만 ‘사람은 죽기 위해서 산다’는 명제가 그래도 가장 인간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더구나 ‘노인은 죽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은 그저 ‘살기 위해서 살기’ 바쁩니다. 젊을 때야 그럴 수 있겠지만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여전히 살 걱정만 한다면 노년답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잘 죽자는 Welldying, Hospeace운동이 확산되어가고 있습니다. 노령화 사회에 익숙한 일본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슈카스, 終活운동이 성행한다고 합니다. 물론 탐욕스러운 무병장수, 때 늦은 Wellbeing보다는 훌륭하지만 아직 건강할 때부터 ‘죽기 위해 산다’는 정신으로 살 수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생물은 죽음을 원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감정이 없을 것 같은 식물도 죽음을 거부하는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하물며 고등동물이나 인간의 죽음에 대한 거부반응은 그야말로 필사적입니다. 필사적이란 일생에 죽음보다 더 큰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태어난 것에 대한 책임은 없지만 죽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일생 중에 가장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람으로 살다가 차디차게 굳은 몸으로 암흑 속에 묻혀 썩어야 하고, 사회의 일원으로 살다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홀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더구나 그곳이 그렇게 무섭다는 지옥이라면 숨이 막히도록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 뚜렷한 소신도 없는 채 죽는 인생도 딱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끝이다, 아무것도 없다’라고 장담하지만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은 허무하고 무책임한 인생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될 일이고, 그렇다면 인간이란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설령 인생이 정말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키우는 강아지와 같다면 지나치게 자학적인 인생관일 것입니다. 죽으면 끝이니 무병장수에 실컷 원 없이 즐긴다고 해서 죽음에 당당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럴수록 오히려 여한과 두려움이 더 많을 것 같습니다. 死라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일인데도 우리는 인생에 대해서 必死的이지 못합니다. 쾌락을 마음껏 누렸을수록 죽음에 이르러서는 공포, 불안, 애증, 원한, 회한, 미련도 클 것입니다. 노년에는 죽음에 대해서 막연히 두려워하기보다는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죽을 때까지 死의 문제를 진지하게 맞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그것이 비록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는 경지라 해도 필사적으로 성찰해 보는 것이 노년의 도리일 것 같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