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을 따를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노인은 행복하다.
인간이 피조물이라면, 그래서 불완전한 존재라면 사람의 生死는 애초부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아예 인생을 포기하거나 되는 대로 산다면 그 또한 인간답지 못한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니 인생에 대해서 궁여지책이라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살고 죽는 문제를 얕은 생각으로 이치를 따져서 말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우선 生에 관한 문제는 이성적 현실철학으로, 死에 관해서는 종교와 신앙에 의지하는 2원적인 사유방법이 어떨까 합니다. 生의 문제야 이성적 현실철학으로 정리될 수 있겠지만 死의 문제는 종교나 신앙이 아니고서는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종교도 절대적 유신론(有神論)과 선택적 유신론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를 전적으로 절대자에게 맡기는 감성적 태도가 절대적 유신론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는 이성적 태도를 선택적 유신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사는 일에만 매어있는 무신론(無神論)으로는 죽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듯이 죽는 일에만 몰두하는 절대적 유신론으로는 삶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살고 죽는 인생의 문제는 무신론이나 절대적 유신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것 같습니다. 한계가 분명한 인간으로서는 인생이 ‘-이다, -아니다’, 내세가 ‘있다, 없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모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는 결국 ‘이성적 有神론’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비로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성과 이성으로 인생의 문제를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는 生의 문제는 사람의 노력으로 대처하고, 死의 문제는 신에 의지하자는 방식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사람의 일로 살다가 내세의 神에게 귀의하자'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이 지나친 합리주의거나 기회주의라고 할지 모르지만 한계가 분명한 인간으로서 삶도, 죽음도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인생이 삶과 죽음, 이성과 감성, 인간의 일과 신의 일로 쉽게 구분되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고 나서 부족한 부분에서 신의 도움을 청하는’방법이 어떨까 합니다. 이는 새로운 궁리도 아니고, 특별한 비결도 아니라 옛날부터 내려오던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 사람의 일을 다 하고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라고 했던 평범한 가르침에 불과합니다. 다만 우리가 이를 잊고 사는 것뿐이지요. 그러나 人事라고 해서 사람의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天命이라고 해서 하늘의 일로만 되는 것이 아닌 것이 또한 인간의 일이 아닌가 합니다. 인생이란 人事와 天命이 겹치고 어우러져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사와 천명이 교차 중복되는 인생에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사람이 하고, 하늘에 의지해야 할 것은 하늘에 의지할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유가나 불교의 도리가 그렇고, 성경에서도 카이사 몫은 카이사에게로, 하느님 몫은 하느님에게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젊을 때야 먹고 살아야 하므로 사는 일이 중요했지만 노년에 이르면 죽을 날이 가까워졌으니 사는 일보다는 죽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盡人事(진인사)를 내세워 늙어서도 여전히 사는 일에 바쁘지요. 하기야 人事란 살아있는 사람의 일이므로 죽을 때까지 사는 일에 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사는 일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하늘의 일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는 일에만 매여 하늘의 뜻에 어긋나게 산다면 어떻게 순순히 천명을 기다릴 수 있을까? 일생을 하늘의 뜻에 따라서 살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살 만큼 산 노년이나마 사람의 뜻보다는 하늘의 뜻에 맞추어 살다가 天命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게 죽음을 맞는 수순이 아닐까 합니다.
하늘의 뜻에 따라 살다 보면 사람의 일에 손해 보는 일이 많고, 자신이 쌓은 선행과 덕행에 대한 하늘의 보답을 확신할 수 없더라도, 궁극적으로 내세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더라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년에는 역시 하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다행히 노력에 대한 신의 보답이 있다면, 죽어서도 또 다른 내세가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 남지 않은 인생쯤은 충분히 거기에 투자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얼마 남지 않는 인생이라 하여 내키는 대로 살기보다는 나머지 몇 년만 손해를 감수한다면, 그래서 막판에 영생영복이 보장될 것이라면 이것처럼 남는 장사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그런지 절이나 교회에 가면 노인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제멋대로 살다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야 天命을 따라나섰다면 얄미운 구석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많은 노인들은 괜찮은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특히 내심 불안하면서도 끝까지 내세를 부정하고, 스스로를 과신하는 소신파 무신론자나 병원 양로원에서 갇혀서 그런 기회마저 잃어버린 불행한 노인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노년이야말로 하늘이 마지막으로 내리신 소중한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젊어서 일찍 죽었다면 이런 기회마저 없었을 것이니 노년이 좋다는 것은 바로 이런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닐까? 그렇게 해서 의연하게 천명을 기다린다면 죽음마저 기꺼이 맞을 수 있지 않을까?
죽을 때까지 오로지 사람의 일에만 몰두하다가 하늘의 뜻을 살필 새도 없다면 人事에는 충실했는지 모르지만 天命을 기다릴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신과 내세를 부정하는 사람이야 天命을 기다릴 필요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지도 못한 인생들이 삶의 문제에만 골몰하다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면 어떻게 의연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겠는가? 신성한 하늘의 일에 이해타산이 심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불경이나 논소(論蔬), 성경이나 성서 이론 신학, 경서(經書)나 주석서(註釋書)에는 철저하고 날카로운 인생 타산이 정연하게 전개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의 타산은 노년의 어수룩한 소망이요, 소박한 선택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