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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Sep 16. 2020

늙어 가세.

늙는 것은 운명이지만 사는 것은 인간의 의지이다. 

  우리 노래 가사에 ‘노세노세 젊어노세’라는 말이 있다. 그때에도 그랬겠지만 한창 일할 나이에 놀자 타령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그래서 ‘노세노세 늙어노세’로 합의된 지 오래이다. 노인들이 젊어서 고생한 덕으로 지금 나라가 이 정도로 살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 보상으로도 편안히 놀고 즐기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고, 사회의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나라가 노인복지가 잘 되어 있는 편에 속하는 것도 늙어놀기에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심각한 노령화 사회에 들어서 노인의 숫자가 어린아이보다 많다고 하니 이제는 ‘늙어 노세’도 속 편하게 할 말이 아니다. 어려운 경제 형편에 노는 데 열중인 노인이 인구의 15%를 차지하고, 얼마 안 가 곧 20%가 될 것이고, 50년 후면 전 인구의 절반이 노인이라고 한다면 나라의 장래가 위험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퇴직, 은퇴, 무직인 노인들이 저마다 팔팔하게 구구까지 놀면서 백 살이 넘을 때까지는 못 간다고 버틴다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건강하다면야 백 살이 어떠냐고 하겠지만 그때까지 심신이 같이 건강하기도 어렵고, 설령 그렇더라도 그 노인을 모시는 자식한테는 효도의 즐거움보다 그 부담이 훨씬 더 커진다. 국가에서는 병들고 놀기 바쁜 장수노인을 모시기 위해서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야 하고, 설령 건강하더라도 그 건강을 관리하기 위한 재정지출이 젊은이의 고통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다. 


  민족중흥의 주역이었던 노인한테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이제는 절대숫자가 늘어난 노인은 희소가치가 없어졌고, 노인부양에 대한 사회적 부담은 민족과 국가를 위한 백년대계를 세우기 어려울 만큼 커졌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제는 늙은이도 노세 타령을 할 시대도 아니요, 더 불행한 일은 이제는 노인이 건강해도 젊은이와 같이 산다는 자체가 버거워진 현실이다. 늙어서도 병들고 쇠약한 몸으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할 수도 있다. 병든 독거노인이 쪽방에서 더위와 추위에 시달리며 아픈 몸을 이끌고 무료급식소를 찾아 헤매고, 폐품을 주워 모아 연명하는 모습은 차라리 참상이다.

 

  물론 재산이 여유 있고, 연금혜택이 많고,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가지고 있어서 정말 ‘늙어 노세’를 누리고, 노익장마저 과시할 수 있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운의 노인은 많지 않고, 설령 그런 노인이라 해도 그 행복은 자신만의 것일 뿐, 가정이나 사회의 행복과 같이 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과거의 경노효친사상이 퇴색되었고, 많은 노인들이 존중받을 만한 어른의 품격을 지니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노인이 너무 많다. 노인은 당연한 권리라고 하겠지만 노인의 행복과 복지는 젊은이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회적 구조가 문제이다. 그래서 많은 노인은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늙은이건 젊은이건 개인의 행복이 사회의 행복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든지, 모든 삶의 기준이 사회와는 상관없이 자신에게만 맞추어져 있다면 그 사회는 행복해질 수 없다. 사회 구성원이 각자 이 사회를 위해서 내가 할 일, 역할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때 사회는 건강할 수 있다. 그 의무, 사명은 노인도 역시 피해갈 수 없다. 물론 젊었을 때 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쳤으니 이제는 효도를 받으며 편히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사회 여건은 그 소망이 수용되기 어려운 형편이다. 만약 그것을 모른다면 곧장 사회의 천덕꾸러기를 면할 수 없다.

 

 장수시대가 되고 보니 부모가 죽기 전에 아들이 노인이 되고, 손자는 조부모, 부모를 같이 모셔야 될 사회구조라면 노인이 편히 살며 ‘늙어 노세’를 구가할 염치가 없다. 더구나 노인이 병들고, 아들과 손자의 경제형편이 여의치 못하다면 ‘늙어 노세’는 커녕 ‘늙어 굶기’가 십상이다. 실제로 아들, 손자 백수가 드물지 않아면 노인은 봉양받기는커녕 자식부양까지 책임져야 하는 캥거루가 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자식과 사회에  자유롭다 하더라도 생산인구보다 피부양인구가 많은 사회라면 늙어 장수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이런 기이한 사회는 일찍이 인류가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이런 사회에서 이전의 정상적인 사회의 사고를 한다면 그것이 비정상이 아닐까?  


  그렇다고 억지로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100년 장수에 매달리지 말고, 젊은이들의 야박함을 탓하기 전에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의무와 역할을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제는 ‘내 나이가 어때서’는 사랑하는 나이가 아니라 일하는 나이여야 하고, ‘못 간다고 전해라’의 이유는 아직은 땀 흘려 일해야 하기 때문이어야 하지 않을까? 경로당에서, 공원에서 무위도식하는 우리 노인들을 보면 미국의 노인들이 공공장소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는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해진다. 이탈리아에서는 늙은 사제가 젊은이에게 인공호흡기를 양보하고 죽었다고 한다. 모두들 코로나의 치사율이 높아서 두려워 하지만 바이러스가 노인들을 집중공략하는 것을 보면 이것도 하늘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이 모자라는 노인들 때문에 사회개혁과 국정쇄신이 늦어진다면 젊은이에게 면목이 서지 않고, 더구나 존경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노인으로서 누릴 권리보다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의무와 역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싫거나 그럴 수 없다면 백 년 타령은 그만두고 지금 ‘그냥 가세’가 어떨까 싶다. 그래서 ‘젊어 노세’는 ‘늙어 노세’로 바뀌었고, 이제는 다시 ‘늙어 가세’로 바꾸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 아닐까? ‘늙어 가세’가 너무 각박하게 들린다면 ‘익어 가세’로 바꾸어 말하면 어떨까? 그래도 늙거나 익거나 가야되는 건 마찬가지이다. ‘살고 죽는 것이 마음대로 되나’만 되뇌이기보다는 ‘죽을 때까지 떳떳하게 살자’를 다짐하고 싶다. 늙고, 죽는 것은 거스릴 수 없는 자연이지만 사는 것은 나의 의지에 달려 있기에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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