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나잇값은 비싸진다.
카톡방에 95살 노인의 ‘뼈저린 후회’가 와 있었다. 65세에 만족스럽게 정년퇴임하고, 나머지 인생은 욕심 부리지 않고 덤으로 알고 살아왔다고 했다. 그래서 특별한 노력이나 목표 없이 30년을 적당히 살아왔다. 퇴임 후 30년이나 더 살 것이라는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으니 그동안 별 생각 없이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생일날에 그동안의 여생이 뼈저리게 후회되었다고 한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 30년 동안 뭔가를 했어야 옳았다. 95살 지금도 멀쩡하니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살 목표를 정해야 한다. 다시는 이런 후회를 하지 않기 위해- 그래서 우선 외국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했다. 참 부럽고, 존경스런 노인이었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니 그냥 부럽고, 존경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의 후회 중에는 자신만 있지 다른 사람 얘기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95년 동안 혼자 살아온 사람처럼- 95살 노인을 지금까지 살아 온 아내와 모셔온 자식에 대한 고마움, 미안한 생각이 없었을까? 지금까지 나와 함께 살아왔던 가족, 친지, 지인에 대한 배려는 왜 없을까? 정년까지 남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고 자부한 노인으로서 날로 심각해져 가는 고령화 시대에 대한 일말의 부담감도 없었을까? 노인은 장수와 공경받을 권리만 있고, 가정과 사회에 의무나 본분은 없는 것일까? 95살 생일을 맞으면서 이런 자성이 없었다면 이야말로 후회해야 될 일이 아닐까? 나만 생각하면서 지난 30년을 후회하고, 또 20년을 더 살려고 마음먹고- 65세 노인이 14세 어린이보다 더 많은 이 시대에 이렇게 나만 행복하고 즐거우면 정말 후회 없는 인생이 될 수 있을까?
그 글을 읽고 처음에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도 정년이란 덤으로 생각했었고, 그 후 30년을 더 산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년장수 시대를 생각하면 정년 후 인생에 대해서 적극적인 계획이 없다면 무책임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노인의 후회가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탐욕이라는 생각이 더 컸다. 95년을 어영부영 살고서도 20년을 더 살려고 했다면 참 염치없는 노인이 아닐까? 그리고 나머지 인생은 우선 외국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 나이에 외국어는 무엇에 쓰려고? 해외여행을 하고 싶어서? 그게 95년을 살아온, 앞으로 20년을 더 살아 볼 노인이 더 살아야 할 이유요, 꿈이란 말인가? 지금이라도 남과 사회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지금 내 정신만 성하다고 해서 고령화 시대에 20년을 더 사는 것이 떳떳한 일일까? 장수 노인이 많을수록 나라와 젊은이들은 더 고통스럽다는 생각을 해 보야야 어른스럽지 않을까? 늙으면 남 생각하지 못해서 도로 애가 된다든지,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도 있건만 스스로 95살 정신이 멀쩡하다고 자신하는 것 자체가 정상이 아니지 않을까?
이런 탐욕스러운 생각들이 카톡을 통해서 돌아다니는 것은 많은 노인들이 거기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이들이 이런 염치없는 노인들의 욕심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지만 부끄러워 물어 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 카톡이 아니더라도 노인들이 모였다 하면 하나같이 그 화제는 건강식품, 무병장수, 여한 없이 말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항상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건강하게 후회 없이 즐겨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사회의 어른으로서 나잇값을 해 보자는 말은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나이가 백 살이 가까우면, 남보다 한 살이라도 더 살았다면 그 값을 해야 옳지 않을까? 각종 사회보장과 노인복지의 혜택을 받고, 연금을 받고, 자식의 효도를 받았으면 내 행복, 만족만 찾지 말고 죽기 전에 자식과 이 사회에 무언가 보답할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싫으면 나 혼자만이라도 멀지 않은 죽음을 위한 준비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세가 있다면 내세를 위한 준비, 내세가 없다면 인생의 마지막을 보다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 노인은 오로지 자신만이 삶의 목적이요, 수단인 것 같다. 딱히 나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인생은 아닐 것 같다. 더구나 젊었을 때에 사회에서 지위와 능력을 인정받았던 사람이었다면 정작 후회할 일은 이 사회에 내세울 만한 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목숨이지만 노령화 시대에 95살까지 살 생각은 없다. 이런 생각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그때가 되면 지구환경이 그렇게 오래 살게 내버려 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노인과 같은 후회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자식과 이 사회에 폐는 끼치고 싶지 않다. 인생을 후회 없이 사는 일도 좋겠지만 내 욕심만 차리며 살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기회가 닿는다면 이 사회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다. 최소한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존재 가치가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이냐고 하겠지만 오래 살려고 애만 쓰지 않는다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은 요즈음 세상이다. 근래 노인들이 나잇값 할 생각은 않고 세상만사를 다 아는 듯 행세하며 가당찮은 나랏일 걱정 도맡아서 하는 것을 보면 코로나가 노인들을 집중공략하는 것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비관주의자라고 하겠지만 보아하니 앞으로는 늙어 오래 살아서 좋은 일보다는 험한 일이 더 많으리라는 생각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장담하는 노인이라면 더불어 말할 대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