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 Education의 원리로 생각하면 창의성 함양이 그 본질이다. 창의성 없는 모방과 숙달은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인간을 만들 뿐이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Trainning이라 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교육과 구분하여 훈련이라고 한다. 훈련은 짐승 길들이기나 비인격적인 군사훈련이나 단순기능, 운동기능 습득 등에 한정된다. 기계적인 훈련은 모방과 반복이라는 점에서 창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근대교육이 서구의 Education을 표방했으면서도 정작 창의성을 놓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구태여 근대교육까지 가지 않더라도 우리의 전통적인 교육관도 창의성을 중시해왔다. 學問학문이라는 것이 問-‘왜’라는 물음에서 출발하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창의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전통의 학문 정신도, 서구의 창의성도 다 놓쳐버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 국민의 ‘빨리빨리’ ‘냄비근성’이라는 것도 이렇게 ‘생각 없는’ 교육풍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없으니 지속성과 의지가 생길 리 없다.
우리의 교육을 생각해 보면 ‘다람쥐 쳇바퀴’를 떠올리게 한다. 다람쥐는 열심히 쳇바퀴를 돌리지만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다람쥐의 반복적 행동은 숙달되기는 했지만 왜 그런 반복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발전과 변화가 없는 것이다.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한 자신의 슬픈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 차라리 쳇바퀴가 없거나 허술할수록 다람쥐는 헛수고를 덜 수 있다. 지금 우리의 교육은 거대하고 악착같은 다람쥐 쳇바퀴 같아 젊은이들을 불쌍한 다람쥐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교육이라면 차라리 걷어치우는 것이 가능성과 창의성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현대사를 보면 학교교육이 짧았던 기성세대들이 고등교육을 받은 신세대들보다 뛰어난 창의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민족중흥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다람쥐 같은 인간에게 사고력, 상상력, 창의력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인간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주관적 판단능력이나 다양한 가치관을 가질 수 없고, 대상에 대해서 비판력이나 판단력이 없는 인간은 능동적인 민주시민이 될 수 없다. 그동안 우리의 교육은 이렇게 비정상적이고 무기력한 인간을 양산해 왔다. 창의적인 교육, 열린 교육, 자기주도적 학습, 학습자중심 학습, 토론 학습, 문제해결 학습 등 화려한 구호가 난무하지만 우리 교실에서는 이들이 아직 낯선 이론에 그치는 실정이다. 만약 그 이론을 충실히 실천하려고 한다면 학교는 실력 없는 학교로 기피당할 것이고, 교사는 무능교사로 쫓겨날 판이다. 교육과정의 구호와는 상관없이 학교에서는 시험기술이나 훈련시키고, 암기 위주의 학습을 능사로 여기며, 과정은 상관없이 결과만을 수치로 평가하는 방식을 신봉하고 있다. 국가가 제정한 교육과정에서도 경험에 의존한 학습목표 달성을 지상목표로 규정하고 있다. 교실에서 신봉하고 있는 학습목표라는 것은 학습의 일반적인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경험에 의한 일반적인 기준, 매뉴얼이 학습의 전부가 되어서는 개인의 뛰어난 창의성을 기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정답을 정해 놓고 이를 강요하고, 선택형 답을 찾아내는 훈련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우리 교육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중에서도 그 폐해가 가장 심각한 것이 선택형 시험문제이다. 객관식이라고도 불리는 이 유형은 원래 군사훈련에서 빠른 시일 내에 많은 훈련병의 서열을 매기기 위한 편의적인 평가방법이었다. 주로 단순암기 기능을 측정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 군사훈련은 단순암기로 충분하다고 믿고 있다 - 사람의 복합적 인지기능을 평가하는 데에는 부적절한 것이었다. 군사훈련에서는 왜?라는 창의적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다. 묻고 따지지 말고 그냥 정해진 시스템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선택형 문제란 예시문항에 정답이 있다는 전제조건이 있으므로 그 이상의 사고력과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이러한 폐쇄적인 문항은 수험자의 능동적인 창의력을 고갈시킨다. 동물 인지능력 실험에서도 미로를 만들어 다양한 선택기회를 주거나 창의적인 문제해결력을 유도한다. 그런데 인간의 교육에 단순 선택권만 부여한다면 생쥐실험만도 못하다. 생쥐한테도 미로학습이라는 다양한 탐구능력을 요구하는데 인간에게 겨우 4지를 놓고 선택하게 하는 행위는 기회주의적인 사고를 조장하는 짓이다. 그 선택이라는 것이 창의적인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고작 눈치를 살펴 어차피 있을 정답을 골라서 찍어내는 요령습득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회주의 요령꾼을 골라내는 평가방법이 수험생의 일생을 결정하는 대입수능시험을 전횡하고 있으니 우리의 인재들은 가장 저열한 선발과정에 희생당하고 있다.
대학입시가 이런 형편이니 각급 학교에서 이것을 따라 하지 않을 수 없어 우리 교육에서 애초부터 창의성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 문제점을 잘 알면서도 이를 개선하지 못하는 이유는 평가의 능률과 공정성을 위해서이다. 창의성을 요구하는 주관식 서술형 평가는 평가의 어려움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평가의 편의를 위해서 교육의 본질을 포기하는 것은 일의 경중을 모르는 짓이다. 시간과 경비가 더 들어가고, 공평성이 다소 손상을 입더라도 과감하게 창의성을 살리는 평가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근래에 수시입학 제도를 운영하고 있지만 형식에 그쳐 창의성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지금 같은 비교육적인 평가는 나라의 장래를 어둡게 한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의 평가를 수치로 나타내려는 것도 무모한데 그 수치마저 고정된 틀에 집어넣고 짜낸 변형된 숫자로 서열을 매기는 것이 우리의 교육평가요, 인재선발 수단이다.
이러한 교육풍토에서 원래 우수한 창의력을 갖춘 학습자는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문제아나 열등생으로 전락하고, 암기력과 요령만을 내세운 학습자가 우등생으로 행세하니 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엄청난 학습량과 최신의 시설과 이론으로 교육 기반시설을 확충했지만 이 사회는 오히려 더 불행해지고 있다. 창의성이 없는 학습자, 급조된 선택형 인간은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나라를 발전시키고, 행복해지자고 국력을 기울인 교육이 오히려 무능력, 기회주의자를 양산하고 나라와 민족을 불행하게 하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창의는 자주정신과 함께 우리 민족 자랑 중의 하나였다. 불리한 지정학적 조건에서 민족의 정통성을 유지해 온 것 하나만으로도 그러한 능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창의성 없는 교육은 우리의 미래를 망치는 대란으로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에 대한 비상한 노력이 없다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에 대한 우리의 경각심은 미약하기 그지없다. 일부에서 그 심각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우리의 정책입안자들은 이를 들을만한 귀가 없고, 실천할 능력이 없다. 국적 있는 교육, 본질적인 교육, 창의적인 교육은 우리가 처한 위기를 구하고,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절실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