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목적인 자식사랑이 가정교육을 그르친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보면 자식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을 것 같다. 다른 대상이야 이성적이고, 이해타산이 있을 수 있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은 무조건이다. 자식 사랑이야 원래 큰 것이었지만 근래 출산기피 현상이 점점 심해져서 한 자녀가 많다 보니 자식은 자신보다 더 귀한 존재가 되었다. ‘무조건’은 이성적인 판단이 없으니 맹목적일 수도 있다. 내 자식을 무조건 ‘최고의 인간’으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당연한 자식사랑일 것 같지만 사실 지나친 욕심이다. 최고란 한 사람밖에 없는 법이다. 그런데 내 자식이 최고가 되려면 남의 자식은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니 얼마나 지독한 이기적인 생각인가? 더구나 최고의 내 자식을 만들기 위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떻게 해서든지’라는 생각은 상식이나 합리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자식사랑이기에 앞서 분별없는 부모의 허욕이요, 대리만족이기 쉽다. 짐승의 자식사랑이야 본능이라지만 그것은 종족을 번식시키는 자연적인 행위이고, 대리만족도 아니다. 그런데 자식에게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는 생각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으니 얼마나 탐욕적이고 무모한 사랑인가? 더구나 자식을 통한 대리만족이라면 사랑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우리 교육의 비극은 이런 비이성적인 가정교육과 학부모의 맹목적인 자식사랑에서 시작되고 있다.
오늘날의 자식은 '어린 왕'이다. 그러나 철이 없다보니 제멋대로 왕이고, 애들 하고 싶은 대로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요즈음 철없는 부모이다. 제멋대로라면 남에 대한 배려는 있을 수 없고, 자연히 이기주의, 개인주의에 젖을 수밖에 없다. 아이 기(氣)를 살려 주는 것은 어떤 사회윤리보다 중요하고, 자식이 하고 싶은 것을 다 들어주려니 물질적인 궁색을 보여주어서도 안 된다. 아이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예절도, 봉사도, 절약도, 절제도, 고마워 할 줄도 모른다. ‘무엇이든지 다 해 줄 테니 너는 공부만 잘 하면 된다’고 귀에 못이 박인다. 형편이 어떻든 내 자식만큼은 최고로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보다 뒷받침을 못해 준다면 부모의 도리를 못하는 것이라고 다짐한다. 자식에게 그것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친구 애들이, 남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따라 해야 한다는 잘못된 강박관념에 빠져있으니 우리의 자식사랑은 맹목적일 수밖에 없다.
왕으로, 모자람 없이, 안 되는 일이 없이, 나밖에 모르는 아이는 당연히 사회에 적응해 나갈 수가 없다. 공가중도덕심도, 겸손도, 사양도, 양보도, 희생도 할 줄 모르는 아이는 사회의 부적응아요, 정신적 허약자이다. 사회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미숙아가 되기 십상이다. 어려서 막무가내 살려 준 기(氣)가 사회에 나가서는 독선과 주눅과 부적응의 원인이 된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는 부모는 현명하지 못하다.
젊었을 때의 만족과 행복이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닐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만족하고 행복했다면 나이가 들수록 그 만족과 행복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사람의 욕심은 만족과 행복을 오래 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 만족과 행복을 갖는 것보다는 늙어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그것을 차지하도록 하는 것이 더 큰 자식 사랑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만족과 행복은 젊었을 때 적었을수록 늙어서는 더 커지는 것이다. 모두들 부모찬스를 부러워하지만 지나친 ‘부모Chance’는 자칫 ‘부모Trap’이 되기 십상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금수저는 오히려 화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맹자는 배불리 먹고, 풍족하게 살면 짐승이 되기 쉽다고 했다. 금수저, 부모찬스 시대에 철없는 소리라고 비웃을 사람이 많겠지만 어렸을 때 아쉬움 모르고 제멋대로 철없이 성장하면 예의염치를 알기 어렵다. 요즈음은 금수저가 출세하기 좋은 사회구조이지만 ‘출세’와 ‘사람 되는 것’하고 전혀 다른 것이다. ‘되지 못한 사람’이 출세한다면 부모도 좋을 것 없고, 사회는 불행해진다. 우리 속담에도 가난 속에 효자 난다라고 했고, 숙수지환(菽水之歡)은 ‘콩물 마시던 행복’이란 말이다. 콩물이란 맛있는 두유가 아니라 어렸을 때 부모 잘못 만나 콩비지로 배를 채우던 행복이다. 아쉬움 없이 자란 자식은 부모 고마운 걸 모르는 법이다.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느냐’고 대드는 자식에게 부모의 무능을 자책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철없이 키운 자신을 통탄해야 옳다. ‘나쁜 자식’에 앞서 ‘어리석은 부모’였지 않았는가? 인기 드라마 '스카이캣슬'이 어찌 남 일인가? 어렵게 살았던 자식은 효도를 하지만 풍족하게 자랐던 자식은 효도는커녕 패륜도 서슴지 않는 현실을 무서워 해야 한다.
자식을 입신양명하여 출세시키는 것이 부모의 도리요, 보람으로 여겼던 생각은 옳지 않을 것 같다. 자식을 출세시켜 놓고 남에게 자랑을 하는 즐거움도 적지 않겠지만 혼자서는 속이 쓰릴 때가 더 많을 것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부모가 원하는 틀에 자식을 묶어두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주고, 부모가 아니라 자식이 행복하게 살게 해 주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자식들은 이미 부모의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졌음을 알아야 한다. 신세대들은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희생했던 것처럼 부모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내 인생은 내가 산다’는 것이 요즈음 젊은이들의 인생관이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고, 부모도 자신의 인생이 있으므로 성인이 된 자식까지 책임질 의무도 없는 것이다. 이제 늙기까지 부모와 같이 살고 싶은 자식은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사 초년생인 제자가 답답한 심경을 말해왔다. 애들이 도무지 꿈이 없고, 그저 ‘돈 많은 백수’가 제일 좋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하다고 했다. 그 자신이 그런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처지에서 학교 다닐 때에 들었던 이런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아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것이 어찌 그 제자에 한정된 일이겠는가? 요즈음 젊은 부모들 중에는 아직도 자식교육에 맹목적인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많아서 걱정이다. 무조건적인 자식사랑은 옛날에도 없었던 잘못된 가정교육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