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의 아름다웠던 교단 이야기
40년 교단생활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아이가 있다. 내가 그 학교를 떠난 뒤로는 한 번도 그 애 소식을 들어 본 지가 없어 더 애잔하고, 그립고, 부끄러운 추억이 되었다. 세상에는 제자들을 훌륭히 길러낸 미담도 많은데 나는 거꾸로 아이의 큰 덕을 입은 교사 실패담이다. 드러낼 이야기가 못 되지만 지금의 학교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일이라 그럴 수 없었다.
나의 교사 첫 발령지는 충남의 태안읍사무소가 있는 바닷가 소도시의 여중학교였다. 교사 경력 4년 차에 2학년 담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나의 학급경영의 최우선 과제는 우직스럽게도 공부 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기 시험이 끝나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전 번 성적과 비교하여 올라가면 칭찬이 한 바탕이었지만 떨어지기라도 하면 닦달이 두 바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매타작이요, 아니면 전체기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날은 전체기합을 주기로 했다. 60여 명이 되는 애들을 운동장에 데리고 나가서 흙바닥에 무릎꿇기 벌을 주었다. 지금 같아선 생각도 못할 일이 그때는 다반사로 벌어졌던 것이다. 그나마 오래 꿇고 있으면 사고가 날까봐 5분에 한 번씩 일으켜 세워서 무릎을 푸는 운동을 시키는 것이 나름대로 요령이었다. 무릎을 펴고 다시 꿇어 앉으면 모래에 더 아프긴 하지만 그런 정도의 체벌은 가벼운 것으로 생각했었다. 윗분들도 못마땅했지만 아직 젊어서 그러려니 여겨 모른 체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그날은 날이 더웠다. 얼마 있다가 한 애가 쓰러지는 사고가 벌어졌다. 황급히 숙직실로 옮겼다. 그런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아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눈이 뒤집히고 입에 거품을 품고, 손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사태가 급하여 급히 병원에 옮겼다. 응급처지를 해서 겨우 안정이 되었다. 그런데 의사가 큰 일이나 벌어진 듯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짐작컨대 과잉진료인 듯싶었지만 애를 생각하니 의사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돈을 벌고 싶었겠지만 나로서는 큰 사고를 친 셈이었다. 하루 만에 퇴원을 하였다. 나는 병원비를 내고 학부모에 사과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기억이 명확하지 않지만 그 애에 대한 사죄가 부족했고, 애는 기운이 없어하니 부모를 서운하게 했던 것 같았다. 그날은 퇴근길에 동료 교사하고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 애 집에서 나를 보자고 연락이 왔다. 가보니 아이는 힘 없이 이불 위에 앉아있었고, 부모는 냉랭한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간단히 예를 표하더니 이 애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따져들었다. 술이 확 깼다. 나의 잘못이야 말할 것도 없으니 백배사죄를 드렸다. 그러나 부모의 태도는 여전히 적의가 가득했다. 결국 배상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이도 샐쭉한 표정을 짓고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뒤늦게 거듭 사죄를 드렸지만 사태는 수습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이대로 부모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체벌은 어느 정도 허용되던 시대인지라 내가 이에 굴복하여 배상을 하면 교사들은 체벌을 하다가 배상하기에 바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안 그래도 체벌에 의한 사고가 일선 학교에서 심심찮게 일어나고 있었다. 막상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벌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는 형편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엄연한 교권침해라는 뻔뻔스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단호하게 학교를 그만 둘지언정 교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럴 수 없다고 맞섰다. 아마도 술기운이 그런 만용을 저지르게 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짓이었지만 의외의 반격을 받은 부모는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아이도 나의 완강한 태도를 보더니 울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선생님이 학교를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만약 선생님이 나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두면 나는 무슨 낯으로 학교에 다니겠느냐고 했다. 그때만 해도 교사는 지역의 유지급 예우를 받았으니 더구나 학부모한테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형편에 사태가 이렇게 되자 부모는 이내 태도를 바꾸고 오히려 나에게 사과를 했다. 자기가 잘 못 생각했으니 용서하라고- 술기운에 드러낸 적반하장의 만용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온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아이가 그렇게 고맙고 예쁠 수가 없었다. 순진한 아이 덕분에 별 일 없이 사고를 무마할 수 있었다. 그 애에게 큰 절이라도 해야 했지만 학교에서 얼마나 더 관심을 드러냈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러나 특별히 드러내놓고 잘해 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이유야 어쨌든 학생에 대한 편애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 염치없는 담임이었지만 그 후로는 애들에게 체벌을 하지 않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얼마 후에 그 학교를 떠났기 때문에 그 애한테 더 잘해줄 기회도 없었고, 그 애하고 특별한 인연도 마련하지 않았다.
내가 벌였던 그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이었고, 그 애가 얼마나 고맙고 기특한 애였는지를 깨달은 것은 한참 세월이 흘러간 뒤였다. 교사의 체벌이 엄금되고, 그것이 학교폭력이 되어가다 보니 새삼 죄책감이 들고, 그 애 생각이 간절하였다. 그래서 태안에 가서 그 애를 찾아 보았지만 그 애는 이미 이사를 가고 난 뒤였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때 좀더 적극적으로 노력했더라면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 일에 바쁘다보니 몇 차례에 그쳤던 같다. 참 고맙고 기특한 애였는데- 그저 미안한 마음만 컸으니 나는 낯 두꺼운 교사였다.
그 뒤로 교권은 날이 갈수록 추락하였고, 내가 벌였던 사건은 지금 같으면 고발을 당해서 형사처벌을 받을 일이었다. 그럴수록 그 애 생각이 더 했지만 종적을 찾기 어려웠고, 세월이 가다 보니 그냥 애잔하고, 부끄러운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그 애를 찾을 수 있다면 꼭 만나고 싶다. 그 애야말로 스승을 존경하였던 순수한 제자였다. 내가 더 적극적으로 노력하면 그 제자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열의가 없으니 역시 부끄러운 스승이다. 그 이름은 조미숙, 지금 나이가 50대 중반이 되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숙이와 연락이 닿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참 좋겠다.
이 사건은 내 교직생활 중 가장 잊어지지 않는 추억이다. 지금의 세태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라서 더욱 그렇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매를 맞아도 집에 가서는 말도 못 하던 시대도 있었다. 오죽하면 그런 벌을 받았겠느냐고 집에서 더 혼나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대에 교편생활을 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장담컨대 이때가 나의 일생 중에서 가장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호기있게 살았던 황금시대였다. 지금의 교사들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그런 호사스러웠던 교편생활이었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불편했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행복했던 교육자였다. 내가 무난히 교편생활을 마쳤다는 것은 불행보다는 행복이 더 많았던 인생이었노라고 장담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설령 지금 불행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지은 죗값일 것이다. 그러니 더 오래 살려고 애쓰기보다는 매사에 감사하면서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