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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Feb 17. 2021

법대로 민주주의

법치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험하게 한다.

  이 글은 작년 2월에 발표했던 것입니다. 그때 우려했던 일이 지금 현실이 되었습니다. 허울뿐인 자유, 법치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도 모르는 검사들이 법치주의를 공공연히 외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들이 아직 보편적 지성, 민주시민 의식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법치주의는 곧 독재정권과 몰락을 예고하는 것임을 인류역사가 증명합니다.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워 묵은 글을 다시 소환합니다.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살지만 민주주의 대한 오해가 적지 않다. 民主란 글자대로 모든 국민이 주인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었더라도 다수의 국민이 슬기롭지 못하다면 나라는 더 위험하게 된다. 다수결 원칙은 민주주의의 양날의 칼이다.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말처럼 민주주의가 쉽지 않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절대왕정이 무너지고, 국민이 주인임을 선언한 나라도 많지만 통치자가 국민을 억압하고 노골적으로 주인 노릇을 하는 나라는 더 많다. 국민이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나라도 국민이 ‘집단’이라는 사실을 잊고, ‘개인’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개인’은 집단 개념인 ‘국민’과는 분명히 다르다. 개인이 모여서 국민을 이루는 것은 맞지만 국민을 흩어서 다시 개인으로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비빔밥의 재료를 비벼서 비빔밥이 되지만 비빔밥은 도로 재료로 돌아갈 수 없다. 개인주의는 비빔밥이 된 국민을 재료로 돌려놓자는 발상과 다르지 않다. 이런 비유를 수용하지 않더라도 개인주의가 민주주의와 같을 수가 없음은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걸핏하면 민주주의를 빌어서 개인의 자유를 내세우기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한 개인주의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험하게 만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를 비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유가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자유를 ‘내 마음대로’라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반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국민은 집단인데 개인이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집단은 유지될 수 없음은 당연하다. 自由이건 Liberty이건 그 본의는 ‘자의(恣意)’가 아니라 ‘自意’ ‘자율(自律)’이었고, 그 자율은 도덕적 의지에서 나오는 ‘의무’를 의미하였다. 절대왕정 시대에 ‘내 마음대로’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고 문헌에서의 自由는 오히려 不自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것을 ‘내 맘대로’라고 변질시킨 것은 지금의 이기적인 자유주의, 신자유주의자들의 ‘마음대로’였다. 민주주의 정신에 맞는 자유는 ‘내가 누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 절제’여야 한다. 이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가 우선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철학적 무절제이거나 정치적 방종이다. 만약 개인의 자유가 우선이라면 사회의 자유는 지켜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더라도 사회의 자유 안에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사회주의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민주주의는 사회주의의 상대개념이 아니라 원래 사회주의마저 포함하고 있었다. 국민의 사회적인 자율의지 없이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정착할 수 없다.   


  법의 공정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 일면을 인정하더라도 법의 원리를 생각하면 민주주의와는 사뭇 대척적이다. 법은 원래 국민의 권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이 국민을 통치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수단이다. 법의 시초인 함무라비 법전이 그렇고, 우리의 8조금법이 그렇다. 거기에는 국민을 처벌하고 통제하는 법률이 나열되어 있다. 인권이 신장되면서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법이 조밀할수록 그 한계가 더 큰 법이다. 그래서 예외 없는 법이 없으며, 법으로 횡행하는 무법, 불법, 탈법을 막을 수 없다. 법이 아무리 완벽해도 인간의 양심과 心性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범법자를 다스릴 수 있는 법이 선량한 국민마저 다루려고 하는 것은 부당하기까지 하다. 설사 법이 선량한 국민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법치만능주의라면 다수의 국민은 법의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다수의 선량한 국민은 법이 필요 없거나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편을 보면 민주주의라기보다는 법치주의가 아닌가 싶다. 나라의 이목이  온통 법정으로 쏠려있다. 검찰개혁이 시대의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개혁의 대상인 검찰의 위세를 당할 수가 없으니 개혁이 난감하다. 일찍이 ‘검찰공화국’이란 영예를 얻은 검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판사들마저도 법리에 어긋나거나 국민의 법 정서에 이반하는 판결을 하는 일이 적지 않다. 설령 판사가 헌법을 준수하고, 법의 정신과 원리에 의하여 양심에 어긋남이 없이 판결하더라도 그로 해서 나라와 국민의 이익과 행복이 손상을 입는다면 법치주의의 한계일 것이다. 법조인의 전문성도 인정하고, 사법부의 독립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이익과 행복은 더 중요하다. 법치주의가 힘을 얻을수록 민주주의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법은 본질적으로 국민을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는 독재주의와 그 속성이 같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근래 우리의 형편을 보면 법치주의의 시대가 멀지 않다는 우려가 크다.   


  법과 국민의 행복은 공존하지 않는 것 같다. 법치주의자들은 혼란한 민주주의를 법치로 구원하겠다고 나서지만 우리 역사에 법치주의가 성했을 때는 민주주의가 위험했을 때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법치주의가 다시 맹위를 떨치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법관 출신 의원이 46명으로 단일 직종으로 단연 1위라고 한다. 검찰총장이 유력한 대선후보로 급부상하고 있고, 법조인들의 법리해석이 곧 사회정의인 것처럼 권위가 있다. 만약에 검사가 대통령이 되고, 법관들이 입법부를 주도하고, 법조인의 뜻이 곧 사회정의로 받아들여진다면 법치주의 사회가 될 것이다. 옛날에는 권력자가 법관들을 시녀로 삼았지만 이제는 아예 법관의 직접 통치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법 무서운 줄 모르고, ‘법대로 하자’고 대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무법천지는 피해갈 수도 있어도 악법천하는 벗어날 길이 없는 법이다. 법이란 냉혹하고, 비인간적이면서도 허술하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한다. 국민의 확고한 수호의지가 없으면 민주주의는 항상 위험하다. 통치자들은 기회만 있으면 법을 내세워 국민들의 주권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법관이 법전에만 몰두하다가 사건의 진실을 보지 못하거나, 문을 걸어잠그고 법리(法理)만 따지고 있다면 일의 선후(先後)와 경중(輕重)을 모르는 어리석은 법리(法吏)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굴복하고, 양심을 저버린 사법농단이나 법관추문이 끊이지 않는다.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는 새삼스레 꺼낼 것도 없지만 법원마저 그런다면 우리 법치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 사회정의는 법치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주적인 사회정의는 법이 아니라 사회의 의로움에서 출발한다. 이른바 義는 法이 아니라 ‘옳음’이다. 법은 다만 ‘그름’만 다스릴 수 있을 뿐인데 ‘옳음’까지 구속하려 한다면 살벌한 법치천하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승자박(自繩自縛) 작법자폐(作法自弊)는 냉혹한 법치천하를 경고하는 말이다. 총으로 일어나는 자 총으로 망하고, 법으로 일어나는 자 법으로 망하는 법이다. 민주주의는 법으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정의로운 의지’에 의해서 성장한다는 사실을 국민이 잊어서는 안 된다.


自繩自縛자승자박  승은 끈. 박은 묶다. 끈은 법률. 법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법에 걸려들다. 법이 치밀할수록 사람에게는 가혹한 법이다.


作法自弊작법자폐. 법을 가혹하게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법에 의하여 죽다. 진나라 상앙(商鞅)은 법치주의자로 가혹한 법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법에 의해서 잡혀 죽었다. 진나라도 법치주의로 통치하다가 30년도 못 갔지만 한나라는 법을 허물어 400년을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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