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우리 스님.
贈僧 증승 鄭澈정철(1536-1593)
曆日僧何識 스님이 어찌 절기를 알랴?
出花記四時◎ 꽃이 피면 봄인 줄 알고,
時於碧雲裏 푸른 구름에서 여름을 어림하고,
楓葉坐題詩◎ 단풍잎에 앉아서 가을을 읊을 뿐. (스님이 어찌 절기를 알랴?)
<우리시로 읽는 漢詩>
스님의 단순한 행동을 통해서 속세를 떠나 자연에 몰입하는 삶의 경지를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계절의 변화를 알기 쉽고, 평이한 시어로 알기 쉽고, 재치있게 표현한 솜씨기 돋보입니다. 원 제목이 贈僧-스님에게 드림-입니다. 여기의 스님은 세상의 구차하고 자잘한 제도, 관습, 문화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고승입니다. 정철은 저명한 정치가요, 시인입니다. 가사(歌辭)와 시조(時調)의 일인자이기도 하지만 한시에서도 수작을 많이 남긴 조선의 대표적인 문인입니다. 그런데 정철을 놓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뛰어난 문인이 훌륭한 인품을 겸비했다고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더구나 스님을 우습게 보았던 당시라면 번역도 '스님'보다는 '중'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아보이기도 합니다.
曆역日일僧승何하識식.
曆日은 절기(節期), 시절(時節), 일력(日曆). 또는 넓게는 세속입니다. 세상을 등진 스님에게는 時節마저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나마 자연의 변화가 그에게는 계절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僧을 ‘스님’으로 옮겨야 할지, 아니면 ‘중’이라고 해야 할지도 시경(詩境)에 영향을 줍니다. 당시의 사정을 생각하면 ‘중’이라고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만약 ‘중’이라고 한다면 僧의 의식수준이 갑자기 낮아져서 일력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자연의 변화로 겨우 계절을 짐작하는 우매한 땡중을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님’이라고 번역하면 갑자기 속세의 일체를 초월하여 자연에 몰입하는 달관의 경지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何識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찌 알랴?’라고 했습니다. 속세를 떠난 고승은 속되고 자질구레한 세상사에는 일체 관심이 없다는 뜻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이 어찌 절기를 알랴?’라고 했습니다. 한시의 구조는 통상 기승전결(起承轉結)이라 해서 첫 구인 起는 주제의 실마리를 제시합니다만 이 시는 거꾸로 여기가 시의 주제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역전, 도치법이라는 특이한 수법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는 뒤에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우리시로 옮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出출花화記기四사時시.
出花는 ‘꽃이 피다’. 記를 서술어로 삼되 ‘기록하다’라고 하기보다는 ‘기억하다’라고 풀이해야 시의(詩意)에 가깝습니다. 四時는 ‘四季’입니다. 四時라 했지만 여기에서는 구체적으로 꽃이 피는 봄입니다. 재치 넘치는 시는 최대한 간결하게 옮겨야 그 묘미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기억하다’보다는 ‘알고’라고 옮기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계절을 아는 것은 일력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짐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꽃이 피면 봄인 줄 알고,’라고 했습니다.
時시於어碧벽雲운裏리.
時는 ‘때, 시절’입니다. 이를 2구의 四時와 동의어로 보고서 碧雲에 맞추어 ‘여름’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실제로 구름이 푸를 리 없지만 구름이 여름 녹음의 빛깔에 물든 것처럼 표현한 솜씨가 범상치 않습니다. 裏는 ‘속, 안’이지만 생략하고, ‘푸른 구름’으로 충분합니다. 원시의 글자를 충실히 옮기는 것은 좋지만 모든 글자를 다 옮기려 한다면 우리 시에 손상을 줄 수도 있습니다. 원시에는 서술어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우리시에서 보완해야 하는데 앞 구 의 서술어인 ‘알고’와 반복되는 것을 피해 ‘어림하고’라고 했습니다. 절기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보다는 대충 짐작하고 사는 것이 시공을 초월한 더 높은 자연친화의 경지일 것입니다. ‘푸른 구름에서 여름을 어림하고,’
楓풍葉엽坐좌題제詩시.
楓은 단풍. 葉은 단풍잎, 坐는 앉다. 시어의 간결을 위해서는 葉을 생략해도 되겠지만 坐를 살리기 위해서는 ‘단풍잎’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題는 ‘시를 짓다-作題’라는 동사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를 짓다’라고 하기보다는 가을의 흥취와 관련지어 ‘가을을 읊다’라고 하는 것이 자연친화의 시의를 더 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시에는 없지만 ‘뿐’을 보완하여 간결하게 맺음을 하는 것이 여운도 남기고, 僧의 경지도 높이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것 말고는 어떤 일에도 관심이 없으니 그만큼 무념관지(無念觀止)의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단풍잎에 앉아서 가을을 읊을 뿐.’이라 하였고, 만약에 번역시가 아니라면 여기에서 다시 첫 구를 반복하여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스님이 어찌 절기를 알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