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가 모래가 되도록
증운강 贈雲江 李玉峯 이옥봉( ? - 1592)
요즈음 편안하신지요?
近來安否問如何◎
달빛이 창에 비치면 한도 많아서요.
月到紗窓妾恨多◎
꿈길에도 발자국이 남을라치면
若使夢魂行有跡
문지방 섬돌은 벌써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門前石路便成沙◎압운
<우리시로 읽는 漢詩>
이 시는 남편인 운강 趙瑗(조원)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독백체로 되어있습니다. 玉峯은 조원의 小室이었다고 하니 구체적으로 사랑의 대상이 밝혀진 작품입니다. 평이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과장법을 사용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사랑의 열정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다는 간절한 사랑을 재치있게 서술한 솜씨를 전달할 수 있도록 여인의 어조와 화법을 살려야 합니다. 소실로서의 간절하고, 서러운 사랑의 심정이 애처롭습니다.
近근來래安안否부問문如여何하.
이를 직역하면 번거롭고, 시인의 재치 있는 詩境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安否와 如何는 ‘안부를 묻다’로 시율을 맞추기 위한 중복 글자이므로 이것을 다 옮기면 군더더기가 될 것입니다. 問도 ‘묻다’이지만 따로 옮길 필요 없습니다. 여인의 진솔한 애정을 노래한 것이니 평이한 구어의 대화체로 옮겨야 좋습니다. ‘요즈음 편안하신지요?’. 직역한 ‘근래 안부 어떠신지 물으니’와 비교해 보세요.
月월到도紗사窓창妾첩恨한多다.
月到는 달이 창가에 떠 오르다. ‘달이 창에 떠오르면’과 ‘달빛이 창을 비치면’을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紗窓은 ‘비단창문’으로 여인이 거처하는 방의 창문입니다. 여인이 사는 방이라 해서 비단이라는 법이 없으니 비단은 생략하는 것이 좋습니다. 시인은 실제로 소실이었지만 妾은 ‘여인’으로 옮기는 것이 무난할 듯합니다. 恨多는 ‘한이 많다.’이지만 ‘많아서요’라고 하면 恨의 원인이 밝혀질 것입니다. 원작에는 없는 ‘요’ 한 자의 시적인 효과가 두드러집니다. 창에 달빛이 비치면 오지 않는 님이 더욱 간절해지겠지요. ‘달빛이 창에 비치면 한도 많아서요.’. ‘달이 창에 떠오르니 여인의 한도 많네.’와 비교해 보세요.
若약使사夢몽魂혼行행有유跡적.
若使를 ‘만약’으로 옮겨도 무방하겠지만 생략하는 것이 시를 더 깔끔하게 합니다. 有跡을 ‘발자국이 남을라치면’이라고 한다면 그 어미 속에 ‘만약에’라는 시의가 스쳐 반영시킬 수 있는 묘미가 있습니다. ‘남을라치면’은 ‘남는다고 한다면’을 시적으로 옮긴 것입니다. 夢魂은 꿈속을 헤매는 간절하고 가련한 여심으로 ‘꿈속의 영혼’이란 뜻이지만 이대로 옮기면 번거로워지므로 과감히 줄여서 ‘꿈길’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行은 꿈길에 이미 반영되었으므로 생략합니다. ‘만약 꿈속 영혼에 흔적이 남는다면’과 비교해 보세요.
門문前전石석路로便변成성沙사.
門前은 당연히 님의 문전입니다. 돌길이 발걸음에 닳아 모래밭이 되었다는 말은 ‘돌계단이 모래가 되도록’ 밤마다 꿈길에서 님을 찾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는 말이니, 사랑하는 님에 대한 애정의 강도를 과장한 재치 넘치는 표현입니다. 石路는 돌길보다는 섬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정서에 좋고, 便은 ‘곧’ ‘바로’이지만 상황의 완료라는 詩意를 강조하기 위해서는 ‘벌써’라고 옮기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혹은 便이 ‘半’자로 되어있기도 한데 그러면 돌의 절반이 모래로 변했다는 것이니 詩意가 便만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沙는 가는 모래, 砂는 굵은 모래나 자갈이니 沙인 이유가 있지요. ‘문 앞 돌길이 곧 모래가 되었을 것이네’와 비교해 보면 직역과 의역의 차이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는 생략, 보완의 의역과, 어미 어조사의 적절한 변용이 詩意(시의)와 詩想(시상), 詩境(시경)을 더욱 좋게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는 중국의 사이트에서도 올라 있더군요. 우리 시로서는 흔치 않은 일이라서 더욱 소중하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모르고 있다면 선조에게 죄송스러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