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고유어를 지키자.
제주도의 매력 중의 하나는 우리 고유어가 많이 남아있는 것이다. 더구나 제주에만 있는 제주 방언은 비록 소통성은 떨어진다는 문제는 있지만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으로서 최소한 지명, 명사(名詞)라도 지켜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새로운 문명이 들어오고, 소통의 불편으로 해서 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문화 흐름의 추세라 하더라도 우리 고유어가 사라져 간다는 것은 단순한 아쉬움이 아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정신, 얼이 들어있기 때문에 단순한 언어문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근래 ‘민족’ ‘정체성’이란 말에 불편을 느끼는 사람들도 늘고 있어 더욱 그렇다.
한자로 된 제주도의 지명은 원래 고유한 지명이 후에 한자로 대체된 것은 육지나 마찬가지이지만 보다 근래의 일이다. 그래서 도로안내판에 적혀있는 대부분의 한자 지명이 더 아쉽다. 地名은 그 지역의 특성이나 내력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어서 단순한 이름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데 漢字로 된 지명에는 그러한 고유의 의미가 남아있기 어렵다. 濟州는 육지로 건너가는 곳, 西歸浦는 서쪽으로 돌아오는 포구, 朝天은 하늘이나 임금이 있는 곳을 바라보는 곳이고, 涯月은 달이 떠있는 바닷가, 牛島는 소를 닮은 섬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漢字 地名들에는 나름 그 지명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한자 지명에서는 그런 의미를 찾기 어렵다. 대개의 漢字 지명은 원래 고유어였던 것을 그 발음과 비슷한 한자로 대체한 것으로 본래 의미와는 멀어진 경우가 많다. 무식의 소치인지 몰라도 衣貴, 爲美, 表善, 大靜, 挾才, 江汀, 咸德, 猪旨, 翰林, 塞達, 中文 등에서는 그 지역의 특성이나 의미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비해서 모슬포, 어승생, 오름, 외돌개, 돈내코, 곶자왈, 올레, 빌레, 숲섬 등에서는 그곳의 특성이나 내력이 들어있기에 친근감이 들고, 우리의 숨결이 느껴진다.
언어는 시대와 필요에 의해서 바뀌어가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에서 우리 고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리의 얼을 계승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를 지켜내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국어사랑 나라사랑’도 그런 의미의 구호이다. 그런 인위적인 노력이 부자연스럽다면 최소한 어설픈 짓으로 문화파괴라도 안 했으면 좋겠다.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일을 목격하였다. 멀쩡한 우리말인 산굼부리를 山君不離, 거문오름을 拒文岳, 외돌개를 孤立岩이라고 도로표지판에 한자표기를 한 것은 부끄러운 문화파괴 행위에 가깝다. 그 한자 표기는 본래의 뜻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한자로 적은 발음기호일 뿐이다. 그 이유를 물어보니 중국인을 위한 친절이라고 한다. 중국 관광객이 많은 곳이기는 하나 그것은 친절이 아니라 배알이 없는 짓이요, 문화사대주의적인 행위로 보인다. 그런 억지 한자로 표기하지 않아도 그들은 이미 병기된 영자표기로 다 읽을 수 있다. 그 수준도 못 되는 중국인을 위해서 배알없는 과잉친절은 역겹기까지 하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친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엉뚱한 우월의식만 길러 줄 뿐이다. 역사날조도 모자라 문화침탈을 일삼는 그들에게 우리 고유지명까지 한자로 적어준다면 제주까지 중국 땅이라고 우길지 모른다. 그리고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언젠가는 그 엉터리 한자 이름이 정말 지명으로 대신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제주의 한자 지명 중에는 그런 과정을 거쳐 굳어진 이름도 적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제주 한자 지명이 그 지역의 특성과 내력을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런 억지 과정을 거쳐서 붙여진 한자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고유어를 우습게 생각하고, 그것을 한자로 적기 좋아한 귀양객들의 소행일 것이다. 지금 걸핏하면 영어로 바꾸어 말하기 좋아하는 식자층들이 하는 짓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제주도에 오랜만에 가 보니 답답한 우리의 언어현실이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감수광, 테우리, 물영아리오름, 섯오름, 사려니 숲길, 혼조 옵서예, 혼디 우멍, 멘드롱, 배우게마심- 얼마나 아름다운 제주 말인가? 여기에는 제주방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어들이 숨쉬고 있다. 소통이 불편하다고 해서 이런 아름다운 말을 쉽게 버린다면 참 안타까운 일이다. 제주방언에는 유달리 ‘ㅇ’으로 끝나는 말이 많은데 고려가요에서도 그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흔히 음악적 효과를 위해서 일부러 ‘ㅇ’을 덧붙인 것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지금 제주 방언처럼 실제로 ‘ㅇ’음을 많이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제주방언에는 우리의 고어(古語)가 살아 숨쉬는 국어 연구의 보고일 수도 있다. 이는 비단 地名, 언어뿐이 아니라 우리 문화 전체에 걸치는 문제이다. 우리 언어의 고유성을 잃어버린다면 곧 우리의 역사와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제주도 도로표지판에서 우리의 의식구조를 본 것 같아서 이번 여행길이 매우 편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