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노인의 미덕이다.
나이가 들면 사고활동이 어지럽고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옛날에는 경험 많은 노인의 지혜를 존중했다. 그때의 노인이란 지금처럼 정신 사나운 노인들이 아니라 노련한 중년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도 나이가 들어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노인도 있지만 매우 드문 일이어서 아무나 노인의 지혜를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산이나 가방을 자주 놓고 다니는 것은 젊었을 때도 그랬지만 늘 핸드폰을 놓고 다니거나 숫자, 전화번호를 자주 잊어버리는 일은 나이짓이 분명하다. 이 나이에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보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지만 벌떡 일어섰다가 왜 일어섰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다리가 허망한 일이다. 늘 쓰던 단어, 이름, 기억들이 좀처럼 재생이 나지 않으니 답답한 일이다. 일상의 단순기억도 그 지경이니 무언가 새로운 일을 꾸미거나 새로 암기를 한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명시, 명언, 경구 같은 것을 간직하고 싶어도 새로 암기할 꿈도 꾸지 못한다. 팔다리에서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머리가 먼저 굳어가니 딱한 일이다.
더구나 디지털의 시대에 살다보니 사람의 기억이란 보잘것없다. 컴퓨터, AI는 인간시대의 종언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다. 본래가 기계치인 나에게는 그런 첨단 알고리즘은 장애에 불과하여 여전히 알량한 두뇌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답답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인간이 늙어진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므로 기억력 쇠퇴를 구태여 서러워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인류가 지금까지 유지해 온 것은 기억, 기록의 덕택이지만 망각이란 두뇌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망각이란 AI가 가질 수 없는 인간만의 특권이다. 망각은 기억으로 차있는 인간두뇌를 비워 생존의 공간을 확보하는 신비한 정신작용이다. 좋은 기억도 하기 바쁜데 하물며 쓰라린 일들을 다 기억하고 있다면 괴로워서 견뎌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잖아도 노인의 오래 된 기억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서 문제이다. 나이가 들면 귀 어둡고, 눈 어두운 이유는 안 듣고, 안 볼 것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억력이 떨어지고 총기가 사라지는 것은 자연의 오묘한 섭리가 아닐까?
머리를 비워두는 작용은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난다. 순간적으로 기억이 단절되는 것은 ‘깜빡’이다. 이것은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라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니 잠깐 잊어버린들 다시 생각난다면 전혀 서운해 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 해도 깜빡이 자꾸 반복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니다. 이 정도가 되면 건망(健忘)이라고 한다. 건은 건강이고, 망은 잊은 것이니 건강과 깜빡이 왔다갔다 한다면 아직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건망이 잦다보면 건망증이라고 한다. 증(症)이니 이미 건강이 위험한 병이라는 말이다. 이 정도가 되면 치매와 거리가 멀지 않다는 위험신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깜빡과 건망증은 내가 원하는 것도 아니고,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할 수 없는 불안에 떠느니 망각의 미덕을 실천해 봄 직하다. 망각(忘却)의 본래 뜻은 단순히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남아있던 기억을 ‘내 의지대로 지워 - 버리는 것’이다. 망각은 기억으로 무거운 머릿속을 비워 주는 능동적인 행위요, 노인네 정신건강을 위한 비방일 수 있다. 귀와 눈이 밝은 것이 총명(聰明)이지만 늙어서 총명한 것이 좋은 일만은 아니다. 구태여 한가한 늙은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임금의 면류관에 늘어뜨린 구슬은 세상사를 가려서 보라는 뜻이고, 귀마개는 가려서 들으라는 의미라고 하니 일없는 늙은이는 망각이야말로 다시 없는 보약일 수 있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망각도 분별이 없다면 치매의 혐의를 벗지 못한다. 옛날에는 치매를 노망(老妄), 망령(妄靈)이라고 불렀다. 忘은 단순히 잊은 것이지만 妄은 제 정신이 아니다. 세상의 어떤 질병도, 형벌도, 불행도 치매보다 더 가혹하고, 비참한 것이 없다. 살아도 죽느니만 못한 것이 치매이다. 내가 치매가 아니라고 우겨봐야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어차피 나이가 들면 남이 먼저 판단하는 것이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치매라고 자인할 수 있다면 아직 치매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치매인 줄 알 때만 해도 다행인 셈이다. 장수가 좋다지만 오래 살면 맑은 정신이기 어렵다. 그런 재앙이 올 때까지 대책 없이 기다린다면 망각의 미덕도 발휘할 기회조차 없을 것이니 딱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