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은 마르지 않으리-
送人 송인 鄭知常정지상( ? -1135)
비 그친 긴 강가에 풀빛 더욱 푸른데
雨歇長堤草色多◎
남포에서 님을 보내니 노래마저 서글퍼.
送君南浦動悲歌◎
대동강 푸른 물이 마를 날 있을까?
大同江水何時盡
이별의 눈물은 해마다 쏟아지는 것을.
別淚年年添錄(作)波◎압운
<우리시로 읽는 한시>
漢詩가 대개 그렇듯이 이 시도 1,2구는 배경, 3,4구는 주제의식이 나타나 있는 구조로서 전후(前後) 양절의 안정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전과 후는 대조된 아이러니 상황 설정으로써 이별의 정한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녹색 푸른색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절망적인 이별을 색채의 기묘한 반어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이별의 정의 폭과 깊이를 대동강 물로 시각화한 수단도 이 시를 돋보이게 합니다. 이별의 눈물이 모여 대동강 물이 되었다는 엄청난 과장이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비유한 점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3구와 4구는 원인과 결과가 도치된 구조이므로 그 묘미를 놓쳐서도 안 됩니다. 이래서 이 작품은 우리 한시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으니 딱 하나의 한시를 암기하고 싶다면 이 시를 권하고 싶습니다.
雨우歇헐長장堤제草초色색多다.
長堤는 ‘긴 둑’이지만 시어로서는 거칠어 ‘강가’로 바꾸는 것이 詩意를 살리는 길입니다. 정을 나누는 공간으로는 둑보다 강이 좋고, 강의 길이는 이별하는 연인들의 슬픔의 길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다소 번거롭지만 ‘긴 강가’라고 해야 좋을 것 같습니다. 歇도 ‘쉬다’보다는 ‘그친’이라고 옮기는 것이 詩意에 가깝습니다. 草色은 풀빛. 多를 초색이 ‘많다’라고 직역하는 것보다는 ‘더욱 푸르다’로 투영시키는 방법이 좋습니다. 비가 온 이유는 풀빛을 더욱 푸르게 하기 위해서이고, 푸른 이유는 이별을 더욱 슬프게 하기 위한 수사입니다. ‘풀핓-푸르다’를 연결시키면 원시에는 없는 우리시의 반복 리듬감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 그친 긴 강가에 풀빛 더욱 푸른데’라고 해 보았습니다.
送송君군南남浦포動동悲비歌가.
送君은 ‘님을 보내다’, 대동강 南浦는 나루 이름입니다. 動을 따로 옮기기보다는 悲歌에 포함시켜 풀이하는 것이 낫습니다. 悲는 원래 歌의 수식어였지만 動을 대신해서 ‘서글퍼’라는 서술어로 처리하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주체하기 어려운 이별의 노래요, 노래하고 싶지 않은 노래이므로 ‘노래마저’라고 하면 이 역설적 상황이 전달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포에서 님을 보내니 노래마저 서글퍼.’라고 옮겼습니다. ‘슬프네’라고 하는 것보다는 ‘서글퍼’가 시적 자아의 감정이 더 직접적으로 잘 드러날 것 같습니다.
大대同동江강水수時하時시盡진
盡은 ‘마르다’, 何時는 ‘언제나’입니다. 여기는 도치된 詩行이므로 종결어미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도 의문사 ‘何’가 있으니 의문종결사여야 하죠. 다음 구와는 도치된 구형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어미를 생략해서라도 종결처리하는 번역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대동강 물은 언제 마를까?’라고 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마치 대동강이 마를 날을 기다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를 날 있을까?’로 바꾸어 보면 ‘마를 리가 없다’는 강한 믿음이 느껴져 원래의 시의에 가까울 것입니다.
別별淚루年연年년添첨錄록(作)波파.
別淚는 이별의 눈물, 添은 ‘더하다’입니다. 그런데 더하다보다는 이별의 눈물이 ‘쏟아진다‘라고 옮기는 것이 시적 정황하고도 맞고, 슬픔의 깊이를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綠波’인가 ‘作波’인가라는 논란이 있었지만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서 ‘綠’이어야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綠波의 원관념은 눈물이므로 ‘푸른 눈물’이 되어서는 곤란해지기 때문에 옛날부터 논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作’으로 하면 정작 푸르러야 할 대동강 물에 대해서는 색채가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詩意를 살리기 위해서는 ‘綠’자가 있어야 하고, 그것도 눈물이 있는 4구가 아니라 대동강 물이 있는 3구로 옮겨서 번역해야 감정이 살아납니다. 이를 지나친 간섭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대동강 푸른 물’이어야 하지, ‘이별의 푸른 눈물’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별의 눈물’도 눈물‘은’이라고 해야 슬픔이 더해질 것입니다. 시에서는 조사, 어미 하나도 허투루 쓸 수 없습니다. 그래야 ‘대동강 푸른 물이 마를 날 있을까? 이별의 눈물은 해마다 쏟아지는 것을.’이 됩니다.
조선의 李廷龜는 이 시에 화운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和韻이란 다른 시의 압운자에 맞추어 지은 것이니 일종의 따라하기입니다.
비 갠 후 풀빛은 더욱 푸르고 芳방草초萋처萋처雨우後후多다◎
저녁놀 물가에는 마름 따는 노래. 夕석陽양洲주畔반采채菱릉歌가◎
우리님 열 폭 푸른 치마에 佳가人인十십幅폭綃초裙군綠록
대동강 봄 물결은 푸르게 물들었네. 染염出출南남湖호春춘水수波파◎
이 작품은 앞 작품의 압운을 그대로 次韻한 모의작입니다. 압운만 그런 게 아니라 내용도 詩想, 詩境도 원작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물론, 그 詩境에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菱은 마름인데 수상식물로 그 뿌리는 먹을 수 있는 구황(救荒)식품의 하나입니다. 그 일은 주로 여인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래도 밑도 끝도 없이 돌출한 여인의 열 폭 푸른 치마를 상대할 대상도 없이 대동강 물이 치마 빛에 물들었다는 말은 어색한 과장이어서 특별한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이 작품에서 정지상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은 동일한 소재를 가지고서도 작자에 따라서 어떠한 차이와 한계를 드러낼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