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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라期

며느라기를 아시나요?

by 김성수

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TV 드라마나 영화는 보지 않는다. 특히 드라마는 시간낭비라는 생각이고, 작년에 억지로 며느리한테 영화관에 끌려간 것이 몇십 년 만에 처음 벌어진 사건이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를 보아도 작품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옆에서 아내한테 조언을 듣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 장면이 한 둘이 아니니 상상력, 유추력이 좀 부족한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며칠에 걸친 아내의 끈질긴 강요로 억지로 드라마 한 편을 보아야 했다. ‘며느라기’라는 제목이 탐탁치 않았지만 마누라 말을 계속 어기다가는 무슨 일이 닥치지 않을까 해서 순종하기로 하였다. 방송국에서는 이미 종영된 지 오래여서 한꺼번에 볼 수 있었다.


‘며느라期’란 원래 ‘며느리 + 아기’의 합성어인데 거기에 ‘기간’(期間)을 더한 말이라고 한다. 기간이란 ‘며느리 노릇 하는 기간’이라는 뜻이다. 한 번 며느리이면 평생 며느리라고 생각하는 꼰대들에게 며느리 역할을 하는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다니 제목부터 고약하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상황이 잘 짐작되지 않아서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니 ‘며느리’는 여자 일생의 한이 맺힌 이름이라는 사실을 어머니나 아내를 통해서 진즉 알았었다. 옛날이야 며느리 설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였지만 지금 그런 며느리질을 감당할 며느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시어머니들은 아직도 자신이 겪어온 ‘며느리의 운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드라마는 그런 한 평범한 가정의 갈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원작은 만화영화였다는데 내용은 절실한 현실이어서 전혀 만화 같지 않았다. 우리의 만화가 이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는데 만화를 시간낭비하는 유치한 것으로 생각해 왔으니 편견이 지나쳤다는 생각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며느리들은 일찌감치 ‘며느라期’ 탈퇴를 선언하고 나선다. 맏며느리라면 으레 가장 모범적인 며느리였지만 여기에서는 가장 먼저 당당하게 ‘며느리 노릇 탈퇴’를 선언하고 나선 것부터 파격이었다. 이어서 시부모 생일과 제사를 계기로 해서 며느리들의 반항이 터지기 시작하더니 추석 명절을 계기로 해서 착했던 둘째 며느리마저 순종을 거부하고 나선다. 드라마는 시부모의 입장보다는 며느리들의 탈퇴선언을 긍정적으로 그려 내는 데 열중하고 있다. 아내는 물론 꼰대인 나도 극 중 며느리들의 행동에 공감이 갈 지경이었다.


시어머니와 시부모는 대개 구세대 사고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신개념 며느리들과 아들의 탈며느리 선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아들들도 처음에는 아내의 돌발행동에 당황하지만 곧 아내의 선언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세태이다. 둘째 며느리는 순종적이고, 착하지만 점차 주변의 흐름에 동조하게 된다. 남편들은 늘 부모 편에 서지만 결국 아내의 사고방식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요즈음 신세대 시부모들은 스스로 옛날의 시부모들하고는 다르다고 자부한다. 자신들의 뼈저린 시집살이를 생각해서 일찌감치 자식들과 같이 살 생각을 접고, 손자 손녀도 보아 주고, 며느리를 딸처럼 보살피고, 배려해 주려고 노력한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모시는 시대’를 감수한다. 자식한테 대접을 받을 생각은 고사하고 용돈 쥐어주기에 바쁘다. 그러느니 차라리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하자 해서 ‘딸며느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 그렇지 정작 며느리를 딸처럼 대하는 시어머니는 흔치 않고, 마찬가지로 시어머니를 친정엄마처럼 생각할 수 있는 며느리도 별로 없다. 요즘 세상에 자식들을 분가시키지 않으면 원시인이요, 손자 손녀를 키워주지 않으면 매정스런 부모를 면치 못하는 세상인심이다. 그나마 드라마에서는 손자 보는 즐거움마저 며느리한테 거절당한다. 그 정도로 부모 자식 관계는 멀어졌다. 그것이 전통적인 인륜도덕에 어긋나고, 가정의 붕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평소 데면스러웠던 드라마였지만 이 정도 수준이라면 시간을 들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는 현대 시부모라고 자부하더라도 아직도 드라마 속의 시부모에서 멀지 않은 노인들이 적잖을 것이다. 일 년에 몇 차례 억지로 시부모 집에 들르거나 며느라기 탈퇴를 선언하는 자식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웬만한 부모들로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세요, 추세라고 탄식하거나 애써 양보하기보다는 그동안 우리들의 관습이 합리적이지 못했다는 반성이 더 타당할 것 같다. 합리적이 다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종속적이고, 보은적인 부자관계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결혼도 늦고, 출산도 늦고, 자식들의 결혼도 늦어 아직도 혈통적인 할아버지는 되지 못했다. 자식들이 모두 독립했고, 가끔 집에 오는 며느리도 밤늦게 먼 길로 와서는 이튿날 아침 식사가 끝나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보통이다. 딸이라면 깨워서 아침을 먹으라고 하겠지만 며느리는 잠이 깰까 숟가락 소리마저 조심스럽다. 그야말로 딸보다 더 귀한 며느리이다. 우리 며느리는 아마도 ‘며느라期’를 따로 계산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드라마를 보고 나서도 마음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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