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묘지에서
祭塚謠제총요 李 達이달(1561-1618)
흰둥이가 앞서거니 누렁이가 뒤서거니
犬前行黃犬隨
들판 쑥대밭에 무덤이 빽빽이 둘러있다.
野田草際塚纍纍◎
늙은이 밭고랑에서 제사를 마치면
老翁祭罷田間道
해질 녘 술에 취한 노인을 아이가 부축해 온다.
日暮醉歸扶小兒◎
당대의 사회상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들판 쑥대밭에 무덤들이 빼빽이 들어차 있는 모습은 아마도 전란 중이거나 그 끝의 참혹한 사정이 아닌가 합니다. 임진왜란을 겪었던 시인임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전란 통에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으니 제대로 된 장례절차도 없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무덤들의 참상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흰둥이건 검둥이건 배가 고파 혀를 늘어트리고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자리에 청명 한식이 되어도 제대로 된 성묘꾼도 있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노인 하나가 제사를 지내다가 서러운 젯술에 취하여 아이의 부축을 받고 돌아오는 참혹한 참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졌습니다. 李達은 조선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릴 만큼 가장 전형적인 漢詩를 쓴 시인입니다. 그러나 서출(庶出)이라는 신분 때문에 불우한 일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白백犬견前전行행黃황犬견隨수.
백견, 황견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내세운 것은 한식 청명의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묘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를 흰 개, 누렁 개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흰둥이, 누렁이라고만 해도 길가에 헤매고 있는 강아지라는 정도는 알 수 있겠지요. 隨는 따르다. 분위기를 생각건대 이 개들은 마른 봄판에 무덤 길가를 헤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굶주림에 시달린 혐오스러운 모습일 것입니다.
野야田전草초際제塚총纍류纍류.
野田은 들판. 草際는 ‘넓은 풀밭’이겠지만 이런 곳은 으레 황량한 쑥대밭입니다. 塚은 무덤. 纍는 쌓여있다. 들판에 쑥대 우거진 곳에 무덤들이 총총히 들어찬 장면입니다. 끔찍한 전란까지 겪은 황폐한 모습이라면 여기에 들어찬 무덤들은 제대로 갖추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老노翁옹祭제罷파田전間간道도.
老翁은 늙은이. 祭는 제사. 罷는 마치다. 제사를 마친 노옹이 공동묘지에서 젯술에 취한 장면이 그려져 있습니다. 제사 지내는 사람이 노인 하나만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제사 지낼 사람도 없을 정도로 참혹한 장면입니다. 젊은이들은 전쟁에 희생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田間道란 들판길이나 밭고랑이겠는데 농사터에 쑥대와 무덤이 들어찼다면 전쟁의 참상일 것입니다.
日일暮모醉취歸귀扶부小소兒아.
日暮 날이 저물다. 醉歸 술에 취하여 돌아오다. 扶 부축하다. 小兒 어린애. 날이 저물자 술에 취한 노인을 아이가 부축해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술을 마신 것’이 아니라 전란의 쓰라린 아픔을 마셨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더구나 무덤의 주인이 노인보다 나이 어린 혼백이라면 그 참상은 더할 것입니다. 어려울 것 없는 번역이나 이러한 참상을 옮겨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한식 성묘 장면이라서 이 시의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이 임진란 후의 모습이라면 매우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漢詩라 해서 우리의 고전문학을 버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