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를 아시나요?
忠 州 石 말 못하는 충주석
권필 權韠(1569-1612)
忠州美石如琉璃 충주의 돌은 유리 같이 고와서
千人劚出萬牛移◎ 떼지어 몰려들어 잘라서 실어간다.
爲問移石向何處 돌들을 어디로 가지고 가느냐 물으니
去作勢家神道碑◎ 권세가들의 신도비를 세운다 하네.
神道之碑誰所銘 신도비문은 누가 짓느냐 물으니
筆力倔强文法奇◎ 필력도 힘차고 문장도 뛰어나다네.
皆言此公在世日 모두들 한결같이 적기를 ‘公은 세상에 있을 때에
天姿學業超等夷◎ 타고난 자질과 뛰어난 학문을 갖추었다.
事君忠且直 임금을 충성과 강직으로 보필했고,
居家孝且慈.◎ 집안에서는 효성과 자애를 다했다.
門前絶賄賂 뇌물은 문 앞에 얼씬하지 못했고,
庫裏無財資◎ 곳간은 늘 텅텅 비어 있었다.
言能爲世法 말씀은 세상의 규범이 되었고,
行足爲人師◎ 행실은 사람들의 師表가 되었다.
平生進退間 평생 일거수일투족이
無一不合宜◎ 도리에 맞지 않는 법이 없었다.
所以垂顯刻 여기에 높이 새기는 뜻은
永永無磷緇◎ 길이길이 잊지 않고자 하는 바이다.’
此言信不信 이 말을 믿든 안 믿든,
他人知不知◎ 다른 사람이 알건 모르건,
遂令忠州山上石 충주 산의 돌들은
日銷月鑠今無遺◎ 나날이 캐내고 쪼개어 남아나지 않았다오.
天生頑物幸無口 돌들이 말을 할 줄 몰랐으니 망정이지
使石有口應有辭◎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참 할 말이 많았을 거요.
권필은 강직한 성품으로 거침없는 언행을 하다가 결국은 필화(筆禍)를 입어 요절한 천재시인인데 이 작품으로도 그러한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필 忠州石으로 만든 신도비(神道碑)만 아니라 여기에는 당대의 시대적인 위선(僞善) 모순(矛盾) 허세(虛勢) 비리(非理)들이 모두 고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시 특유의 형식적 구속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래서 7언과 5언을 섞어 구사하고, 음성율에서도 자유롭고자 했습니다. 특히 5언은 주로 허위로 가득한 비문의 내용이고, 그것으로 한층 더 속도감 있고 긴장된 비판을 쏟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押韻만큼은 고수하여 古詩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고발시는 신랄한 비판정신이 잘 드러나도록 옮겨야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단호한 어미와 강도 높은 어휘를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꼭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압운자(押韻字)마다 종결어미를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忠충州주美미石석如여琉유璃리 千천人인劚촉出출萬만牛우移이.
충주의 돌을 유리에 비유함으로 해서 반어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 좋은 돌에 위선과 허세에 찬 더러운 이름들을 새기는 행위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美石은 ‘아름다운 돌’이지만 ‘유리같이 아름답다’로 옮기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劚은 깎다. 移는 옮기다. 千人萬牛를 ‘천 사람, 만 마리의 소’로 곧이곧대로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떼지어 몰려들어 잘라서 실어간다.’로 충분할 것입니다.
爲위問문移이石석向향何하處처 去거作작勢세家가神신道도碑비.
爲는 생략하는 것이 낫고, 問은 돌을 어디로 가져가느냐고 묻는 장면입니다. 去作은 가져가서 만든다는 의미이지만 앞 구에 向何處가 번역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는 것이 더 시답게 합니다. 去부터는 그에 대한 답입니다. 勢家는 권세가, 신도비는 고관대작들이나 세울 수 있는 크고 화려한 빗돌입니다. 비석 중에서도 신도비라고 지칭한 것은 권세가 고관대작들일수록 허세와 위선이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신도비는 허세, 권세, 위선의 상징물인 셈입니다.
神신道도之지碑비誰수所소銘명 筆필力력倔굴强강文문法법奇기.
다시 작자의 질문입니다. 之는 잣수를 맞추기 위한 虛字이므로 생략합니다. 銘은 金石에 글자를 새기는 행위이기도 하고, 묘비에 써 넣은 한문 갈래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는 후자가 더 좋습니다. 즉 誰所銘은 누가 비명(碑銘)을 짓느냐고 묻는 말입니다. 그런 비석일수록 유명인사의 이름을 팔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는 비명을 짓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筆力은 碑銘 글씨의 솜씨를 말하고, 倔强은 ‘매우 힘이 굳세다’로 붓의 힘이 강하면 명필로 일컫고, 그럴수록 碑의 주인도 존귀해지는 법입니다. 文法은 ‘글을 짓는 솜씨’를 뜻하고, 奇는 ‘뛰어나다’로 풀이합니다. 신도비들은 그 내용의 진실성과는 상관없이 돌의 질과 지은 이, 새긴 이 등의 명성에만 급급했던 허위, 허세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皆개言언此차公공在재世세日일 天천姿자學학業업超초等등夷이.
皆言은 모두들 한결같이 아래와 같이 碑銘을 짓는다는 것이죠. 여기에서부터 비문의 내용을 간접 인용하는 장면입니다. 此公은 죽은 墓碑의 주인을 말하고, 在世日은 ‘살아 생전의 일’입니다. 天姿는 ‘타고난 자질’, 學業은 학문의 성취, 超等夷는 ‘범상한 무리’보다 탁월하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하 모두는 반어적인 냉소와 조소로 가득한 상투적인 허세요, 과장에 찬 신도비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事사君군忠충且차直직 居거家가孝효且차慈자.
여기에서부터는 5언으로 바꾸어 신랄함과 긴장감을 더하는 효과를 노렸습니다. 事君은 ‘임금을 섬기다’, 且는 ‘게다가’ ‘또한’이니 충직한 신하였다는 말입니다. 居家는 ‘집안에 있을 때에는’, 孝는 부모, 慈는 자식에 대한 덕을 말합니다. 주인공은 부모에 효도하고 자식을 사랑한 완벽한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이룬 인사였다는 말입니다.
門문前전絶절賄회賂뢰 庫고裏리無무財재資자.
門前은 문 앞이지만 ‘집 근처’의 뜻입니다. 賄賂는 뇌물이니 絶했다고 한 것은 일체 뇌물을 집 근처에 얼씬하지도 못하게 한 청백리(淸白吏)였다는 말입니다. 庫裏는 ‘곳간’, 財資는 재물이니 곳간에 재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역시 앞 구와 같이 허위에 찬 내용이 반복된 것입니다.
言언能능爲위世세法법 行행足족爲위人인師사.
言은 言行, 能은 충분히, 法은 세상의 모든 법도규범이고, 爲는 ‘되다’로 풀이하면 ‘말을 하면 곧 세상의 규범이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行은 모든 행동거지, 足과 爲는 앞의 能과 爲와 같고, 人은 문장에서 항상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人師는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平평生생進진退퇴間간 無무一일不불合합宜의.
進退間은 일생의 모든 인생여정,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벼슬길의 들고 나는 것을 말합니다. 선비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無一은 ‘하나도 없다’, 合宜는 ‘도리에 마땅하다’입니다. 無一不이라 이중부정되었으니 ‘도리에 맞지 않는 법이 하나도 없었다.’입니다. 실제로 그 미덕을 제대로 실천한 선비는 별로 없었지만 신도비마다 늘 그렇게 쓰여 있으니 그 뻔한 거짓말을 반어로써 조롱한 것입니다.
所소以이垂수顯현刻각 永영永영無무磷린緇치.
所以는 ‘까닭, 이유’이고, 顯刻은 높이 ‘똑똑히 새긴다.’, 垂는 ‘기리다, 높이다’입니다. 磷은 얇은 돌, 緇은 옷감의 뜻이라서 번역하기 마땅치 않지만 이 일들이 영원히 잊히지 않도록 돌에 새긴단 말입니다. ‘여기에 높이 새기는 뜻은 길이길이 잊지 않고자 하는 바이다.’
此차言언信신不불信신 他타人인知지不불知지.
此言은 빗돌에 새겨진 허위와 과장 투성이를 말하고, 信不信은 믿거나 말거나, 知不知는 알거나 모르거나입니다. 여기에 숨겨진 작자의 의도는 신도비에 적힌 상투적인 거짓말을 곧이들을 사람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遂수令령忠충州주山산上상石석 日일銷소月월鑠삭今금無무遺유.
遂는 ‘마침내, 드디어’이고, 令은 ‘하여금’이지만 구태여 옮기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다음을 ‘충주산의 돌들에’ 대하여 영향을 미치도록 하면 됩니다. 日月은 ‘나날이’, 銷 鑠은 ‘캐내고 쪼개어’로 풀이합니다. 遺는 ‘남다’이니 이제 아름답던 충주석은 남아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세상에는 허위에 가득 찬 신도비가 많다는 말입니다.
天천生생頑완物물幸행無무口구 使사石석有유口구應응有유辭사.
天生은 하늘이 만들다, 頑物을 보잘것없는 장난감 같은 빗돌로 풀이합니다, 幸無口는 다행히 하늘이 충주석으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使는 ‘하여금’이니 ‘돌로 하여금’으로 풀이합니다. 有口를 직역하기보다는 ‘말을 할 줄 알게 했다면’정도가 좋을 것입니다. 應은 당연히, 有辭는 ‘할 말이 많다.’로 풀이합니다. 어미로 작자의 비판적이고 조롱하는 의도를 드러날 수 있도록 합니다. ‘돌들이 말을 할 줄 몰랐으니 망정이지,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참 할 말이 많았을 거요.’ 신도비마다 할 말을 다하게 하면 세상은 온갖 허위와 허세, 거짓말로 시끄러워서 못 살 것이라고 했으니 사회고발의 정신이 조소와 조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신도비를 다투어 만들지 못해 안달하는 세상이니 시인은 소리 높여 묻고 싶은 것입니다. 엉터리 ‘신도비를 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