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는 곰주가 아니다.
50년 전, 소도시 공주에서는 세계적인 사건이 일어났었다. 백제 무령왕릉이 발굴되었던 것이다. 젊었을 때에 철 모르고 그 자리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놀기도 했었지만 나중에야 무엄하게도 무령왕을 깔고 놀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공주 시민으로서 그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그것이 세계 발굴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졸속한 발굴이었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못난 후손들은 야만적인 발굴을 함으로 해서 세계적인 망신을 당한 사건이었다. 무령왕릉의 유물로 인해 공주는 무령왕릉 박물관이 세워졌고, 관광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 무지한 발굴로 인해 귀중한 유물들을 잃었고, 유물 연구를 어렵게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빛나는 문화유산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이 역사에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부끄러운 공주의 역사였다.
공주에는 고도(古都)답게 공산성(公山城)이라는 작고 예쁜 백제 성터가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무령왕릉 발굴 전에는 공산성이 공주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공주의 公자는 八자 같은 산줄기 안에 들어있는 ⩟와 같은 공산성의 모양을 본뜬 글자라면 공산성은 공주의 심장이다. 그 밑으로는 공주 같이 예쁜 금강이 흐르고, 성터를 덮고 있는 고목들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학이 앉아 있던 낙락장송이 금강을 굽어보고 있고, 단풍이 눈이 시리게 물들었고, 그 사이로 다람쥐가 도토리를 입이 찢어지게 물고 다녔다. 공주 사람들에게는 이곳이 안식과 힐링의 공간이었기 때문에 산성공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요란한 전기톱 소리가 나더니 얼마 안 가서 공산성을 덮고 있던 아름드리 고목들이 여지없이 잘려나갔다. 그러더니 졸지에 산성의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흉물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까지 예쁜 공주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쫓겨난 백제의 거지 왕자였다. 사정을 알고 보니 나무를 없애 공주의 명물인 산성의 모습을 멀리서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관광도시의 면모를 과시하자는 의도는 좋았지만 멀리서 차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요기를 위해서 공주 사람들의 안식처를 마구 파헤친 것은 속이 상하는 일이었다. 관광객 유치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지나가는 차창 밖으로 다 보이는 공산성을 구태여 내려서 볼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숲은 사라지고 성터만 앙상한 공산성을 더 좋아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천 년 숲도 사라졌고, 새들이 집을 지을 고목도 없어졌고, 벌거벗은 성곽 위로 솟아있는 누각은 넝쿨 걷은 원두막처럼 썰렁했다. 한번 파괴된 숲이 회복되기에는 또 몇십 년이 걸려야 할지 모를 일이다.
공산성을 끼고 흐르는 금강은 이름처럼 비단같이 예쁜 강이었다. 호남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이었고, 맑은 물과 드넓은 백사장은 공주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사대강 사업의 하나로 지정되어 공주보가 금강을 막아놓았다. 강을 막고 나니 수위가 높아져 강이 훨씬 커졌다. 공산성도 더 운치가 있어 보였고, 강물이 풍부해지다 보니 水利의 이점이 있어 보였다. 강변에 둔치 체육공원도 있고, 오리배도 떠 있어 새로운 관광자원이 되었다. 공주보로 해서 다리 하나가 더 생겨 사대강에 대한 말썽에도 공주 사람들은 거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보니 강바닥은 썩어나가 악취나 나고, 강물 고기는 죽어서 허옇게 떠오르고, 전에 보지 못하던 혐오스러운 벌레들이 늘어갔다. 강변의 넓던 경작지는 사라졌고, 애써 파냈던 강바닥은 토사가 도로 쌓여 새로운 섬이 생기고, 몇 마리 있던 오리배 길도 막혀버렸고, 낚시꾼은 있어도 낚은 물고기는 먹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공주보는 철거대상이 되고 말았다. 강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철거를 결사반대하지만 썩은 물이 차있는 금강보다는 살아있는 물이 흐르는 금강이 더 건강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훨씬 많다. 눈앞의 작은 이익에 인간의 가장 소중한 자연을 잃어가는 비극이 공주에서도 여지없이 벌어지고 있다.
공주는 10만의 작은 고을에 대학은 3개나 되고, 전국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몰려오는 명문 고등학교도 3개나 되고, 학생과 교육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교육도시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공주대학교는 개교 80년이 가까운 지방의 명문대학이다. 그래서 그 기념사업도 많이 벌였다. 교정에는 만든 지 40년이 넘는 분수대가 있다. 분수대 화강암 조형물에는 관록과 역사만큼이나 푸른 이끼가 두께를 더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돌을 덮은 이끼를 드릴로 벗겨내고 있었다. 그래야 조형물이 깨끗해 보이리라고 생각한 유아적인 발상이었다. 그러나 역사는 새것이 자랑거리가 아니라 묵을수록 가치가 있다는 상식조차 모르는 만행이다. 가짜 유물을 만드느라고 녹을 입히고, 잿물을 들이는 판에 거꾸로 역사를 벗겨내고 있으니 공주대학교가 기가 막힐 노릇이다.
공주라는 이름은 곰나루의 곰에서 나왔다고 한다. 백제가 망한 후로 당나라가 곰을 한자로 적다 보니 熊津이 되었고, 다시 곰으로 돌아오다 보니 발음이 비슷한 公州로 되었다는 것이다. 아예 '곰나루'나 '고마'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걸 한자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하다. 그러나 공주도 예쁜 이름임에 틀림없다. 예쁜 '공주'와는 이미지가 좀 어긋나기는 하지만 곰은 공주의 상징이고, 그래서 공주에는 곳곳에 곰 상이 서 있다. 그런데 공주의 곰 상은 한결같이 곰을 많이 닮지 못했다. 닮은 구석이 있다면 하나 같이 미련하게 생겼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미련해 보이는 곰상이 우연이 아닌 듯싶다. 공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 ‘곰스런 공주’가 아니라 ‘교육도시’다운 면모를 보여주었으면 참 좋겠다. 그래도 공주대학교 교정에 있는 ‘대웅(大熊)상’은 이름과 달리 작지만 영리하게 생겼다. 시민과 외지에서 오는 손님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고 싶은 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