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벽루에 올라
浮碧樓 부벽루에 올라
李穡(1328-1396)
昨過永明寺 어제는 영명사를 지나다가
暫登浮碧樓◎ 잠시 부벽루에 올랐지.
城空月一片 달빛은 빈 성을 비추고
石老雲千秋◉ 구름은 돌길을 감돌고 있었지.
麟馬去不返 麟馬는 하늘에 올라 돌아오지 않으니
天孫何處遊◎ 천손을 어디에 가서 뵈어야 하나?
長嘯依風磴 성벽 돌길에 기대어 긴파람 부니
山靑江自流◎ 산은 여전히 푸르고, 강물은 무심히도 흐르더구먼.
부벽루는 옛 고구려의 고도 평양 대동강 가에 있는 누각입니다. 거기에 올라 역사를 회고하는 감회를 적은 기행시입니다. 당시는 나라가 국난의 시대여서 시의 분위기가 밝지 못합니다. 고구려의 옛 터전에서 단군을 그리워하는 시정은 외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처한 고려에 대한 아픔일 것입니다.
昨작過과永영明명寺사
昨은 어제. 過는 지나가다. 영명사는 평양 대동강 가에 있는 고찰입니다.
暫잠登등浮부碧벽樓루.
暫登은 ‘잠깐 오르다’입니다. 어제의 일이기 때문에 과거시제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登을 ‘올랐다’라고 하기보다는 ‘올랐지’라고 하는 것이 보다 시적일 것입니다.
城성空공月월一일片편 石석老로雲운千천秋추.
城空月一片을 ‘성은 비었고 달은 한 조각’이라고 하면 불통이고, ‘빈 성에 달이 떠 있고’정도는 되어야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구도 ‘돌은 늙어 구름이 천 년’이라고 하면 이상하므로 ‘바위에 천 년의 구름이 흐르네’정도는 되어야 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달빛은 빈 성을 비추고’라고 의인법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다 자연친화적인 詩境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서술어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비추고’라는 우리말로 보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구와는 대구이므로 대등적으로 이어지는 연결어미가 좋습니다. 石老는 오래된 바위를 활유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직역하면 시어로 적절하지 못하므로 古城의 성벽이나 風磴인 ‘돌길’이라고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앞 구에서 이미 ‘빈 성’이라고 했으니 여기에서는 빈 성에 오르는 ‘돌 길’이라고 해야 대구가 선명할 것입니다. 雲은 月과 짝을 이루기 위하여 ‘천 년 된 구름’이라고 풀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 년 구름’은 ‘달빛’과 대우를 이루기 어려우므로 ‘천 년’ 대신에 ‘여전히’라고 하면 천 년에 해당하는 장구한 세월을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역시 서술어가 없으므로 이를 보완해야 하는데 구름이 돌길을 감돌고 있다는 의미가 좋을 듯합니다. 그래서 서술어를 ‘감돌고 있다’라고 보완하여 사라진 ‘천 년’의 세월의 의미를 반영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대우의 묘미를 살리고, 古城의 고즈넉한 모습과 역사에 대한 경외감을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달빛은 빈 성을 비추고, 구름은 돌길을 감돌고 있었지.’라고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역자의 간섭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도 들어, 그냥 원시에 충실해서 ‘빈 성에 달 한 조각 떠 있고, 古城 돌길에 천 년의 구름이 흐르네’도 한 편의 시일 것이니 비교해 보세요.
麟린馬마去거不불返반 天천孫손何하處처遊유.
去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이 麟馬를 타고 승천했다는 전설을 말한 고사이므로 그것을 찾아 옮겨야 합니다. 원시에는 없지만 ‘하늘에 올라’라고 보완해야 시의가 삽니다.
天孫은 동명왕. 동명왕은 천손이므로 인마를 타고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천손은 어디에 있는가?’이지만 ‘어디에서 천손을 만나볼 수 있을까?’가 회고의 정을 더 깊게 합니다. 遊는 ‘놀다’가 아니라 ‘머물러 있다’이고, ‘만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나타나야 합니다. 거기에는 천손을 만나 민족의 시련을 해결할 방도를 묻고 싶은 심정이 담겨져 있다고 해야 시의에 충실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역사와 동명성왕에 대한 경외의 심경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천손을 만나서 다시 모셔올 수 있다면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숨겨있습니다. 이 두 구는 본래 대우를 갖추어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
長장嘯소依의風풍磴등 山산靑청江강自자流류.
風磴은 돌계단, 長嘯는 ‘긴 휘파람’으로 역사의 회한과 미래에 대한 의지와 기대를 아울러 드러낸 행동입니다. 山靑, 산은 푸르다와 江自流, 강은 절로 흐른다가 이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산과 강이 대등적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아 원래는 山自靑이 음수율을 맞추기 위해서 ‘自’를 생략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생략된 ‘自’를 찾아서 ‘여전히’로 보완하는 것이 原意를 살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어의 보완은 원시에 없던 의미를 새로 더하는 것이 아니라 원시에서 글자로 나타내지 못한 詩意를 찾아 옮겨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江自流의 自는 ‘무심히’라고 달리 말하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流도 ‘흐르네’보다는 ‘흐르더구먼’이라고 하면 시인의 감정이 더 이입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성벽 돌길에 기대어 긴파람 부니, 산은 여전히 푸르고, 강물은 무심히도 흐르더구먼.’이라고 했습니다. 原詩에는 ‘여전히’가 없지만 보완한 것과 비교해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