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동백
제주도를 대표할 만한 것은 단연 동백이다. 육지에도 남부지방에는 동백이 있지만 제주에서는 따로 찾을 필요도 없이 곳곳이 동백이다. 길가에도 동백나무가 지천이고, 아파트에도 정원수로 가장 흔한 것이 동백이요, 돌담과 같이 서 있는 나무도 동백나무이다. 아름들이 동백나무에 머리만 한 돌이 박혀있는 모습은 오래 전에 돌담을 뚫고 나무가 올라온 내력을 안고 있다. 두 팔로도 안을 수 없을 만큼 굵은 동백나무를 보면 김유정의 <동백꽃 필무렵>에 나오는 동백나무하고는 많이 다를 것 같다. 강원도 산골에 동백나무 꽃이 겨울도 아닌데 알싸한 향기를 뿜어낸다는 것은 소설이고, 사실은 생강나무 꽃이라고 한다,
동백꽃은 겨울에 피어서 冬柏이다. 그러니 동백꽃은 처음부터 벌 나비를 만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동백은 새를 통하여 수정을 하는데 새를 불러들이기 위하여 다른 꽃보다 훨씬 많은 꿀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동백나무 숲에서 꽃을 오가는 작은 새가 동박새이다. 동백꽃은 꿀을 주고 동백새는 수정을 시켜주니 둘은 공생의 관계이다. 당연히 ‘冬柏새’일텐데 왜 동박새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동백꽃은 동박새를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꿀을 품고 오랫동안 신부처럼 피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꽃잎은 꽃송이에서 애처롭게 버티고 있다가 어느 날 통째로 땅에 떨어진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꽃이 흩어짐 없이 누워있는 것을 보면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연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것은 영화와 부귀를 마음껏 누리다가 한꺼번에 산산이 흩어져 떨어지는 벚꽃이나 모란, 작약꽃 하고는 그 품격이 다르다.
김영랑이 <모란이 피기까지>에서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이라고 한 것은 좀 이상하다. 모란꽃은 송이째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잎이 하나씩 흩어져 떨어진다. 그리고 김영랑의 고향 강진은 모란보다는 동백꽃이 많은 곳이다. 아마도 그때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기게 했던 꽃은 동백꽃이지 모란꽃이 아니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왜 동백이 아니라 모란꽃이라고 했느냐고, 혹은 모란이 아니라 동백꽃이라고 해야 옳다고 유난 떨 필요는 없다. 문학작품에서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작자의 실수일 수도 있고, 일부러 사실에 맞지 않게 말할 수도 있다. 유행가의 ‘으악새’가 억새인가, 새의 이름인가? 남쪽나라 내 고향 ‘찔레꽃’이 붉으냐, 희냐를 따지는 것은 유난스러운 사람들의 취미에나 해당하는 일이다. 신기한 일은 중국인들은 김영랑의 시를 ‘모란꽃’이라고 하지 않고 ‘冬柏花’라고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유정의 <동백꽃 필 무렵>은 그대로 冬柏花라고 번역한 것을 보면 자기들의 國花 모란이 ‘뚝뚝 떨어졌다’라고 하기 싫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이유는 어쨌거나 그들이 모란을 동백이라고 한 것은 결과적으로는 탁월한 번역이었다는 생각이다.
제주도는 날씨가 따뜻하여 철을 가리지 않는 꽃이 피고 진다. 제주의 신화에 유달리 꽃이 많이 등장하는 까닭이다. 신들이 꽃 가꾸기 시합을 벌이기도 하고, 꽃의 신통력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데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꽃의 세계이다. 제주에 동백꽃이 많은 걸 보면 신화 속의 꽃은 동백꽃이 아니었을까 싶다. 동백나무 잎은 유난히 반질거리는데 그것만으로도 기분을 좋게 한다. 그런데 전에 보았던 동백은 대개 홑꽃이었는데 지금 보니 화려한 겹꽃이 더 많다. 색깔도 빨간 꽃을 비롯하여 분홍, 노랑, 하양을 비롯하여 줄무늬까지 요란하게 장식한 꽃도 있다. 어떤 때는 장미보다, 모란보다 더 예뻐 보이지만 동백꽃은 역시 홑꽃에 붉어야 제 멋이란 생각이다. 동백의 꽃말은 변치 않는 사랑이라고 한다. 그리고 제주의 동백꽃은 4.3의 쓰라린 제주 역사를 품고 있어서 더욱 붉다. 사랑도 붉은 홑꽃처럼 순수하고, 소박해야 오래간다. 화장과 성형수술에 보톡스, 피어싱까지 한 얼굴이라면 아무리 보기 좋은 얼굴이라 해도 가까이 하기에는 부담이 간다.
제주도에는 철이 없는 꽃들이 많다. 12월이 한참 지났는데도 민들레 꽃, 오랑캐꽃, 듬성듬성 철쭉도 피어있고, 털머위 꽃도 아직 붙어있고, 밭에는 완두콩 꽃도 피어있다. 길가에는 커다란 화분에 팬지, 금잔화, 패랭이꽃, 메리골드- 이름을 다 알 수 없는 꽃들이 육지의 여름처럼 피어있다. 꽃이라면 봄이나 여름만 생각하지만 여기에는 정말 철없는 꽃이 많다. 겨울에도 길가에서 흔하게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제주도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장면이다. 만약 육지에서 겨울에 꽃이 핀다면 철딱서니에다 천재지변이 일어날 징조라고 수군댈 것이다. 그러나 정작 걱정스러운 것은 사람이 철이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이 철이 없어지면 못 할 짓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시도, 철도 없이 사람을 못살게 하는 코로나19이다. 이제 2022년이 다가오는데 도무지 물러갈 기미가 없다. 이미 2차 대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핵무기보다 더 무섭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는 듯하다. 흉측한 코로나 바이러스 모양을 보면 자연이 사람에 품은 원한이 그렇게 사무쳤는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들이 지은 죄는 생각지 않고, 예방접종만이 재앙을 막는 길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한쪽에서는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인권침해요, 헌법 위반이라고 버티고 있으니 인간이 철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전염병 팬데믹은 의학적인 방역이나 이기적인 인권 주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이다. 자연환경과 생태계를 되돌려 놓는 것이 지구의 종말과 전염병 창궐을 막는 길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흉악한 팬데믹이 이어서 찾아올 것이다. 이런 험악한 세상에 철을 알거나 모르거나 눈보라 날리는 이 겨울을 골라 꽃을 피우는 제주의 동백은 아직 지구는 살만한 세계라고 일러주는 듯해서 더욱 고맙고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