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만족에서 온다.
甘瓜苦蒂(감과고체)라는 성어가 있다. 단 참외는 반드시 쓴 꼭지가 있다 - 좋은 일 뒤에는 반드시 나쁜 일이 따르기 마련이니 좋은 일을 다 누리려고 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재래종 참외나 오이는 맛이 있지만 그 꼭지는 매우 쓰다. 그래서 참외나 오이를 먹을 때에는 그 꼭지 가까이에서 버릴 줄 아는 지족(知足)과 절제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럴 수 있다면 온전한 그 맛을 즐길 수 있다. 만약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쓴 꼭지를 씹었다가는 여태까지 누렸던 단맛 전부를 잃게 된다.
인생도 참외를 닮지 않았을까 싶다. 젊었을 때야 달기도, 쓰기도 하지만 늙어지면 이제 쓴맛만 남게 된다. 가끔은 달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것은 순간이거나 착각이기 마련이다. ‘나 좋다고 남 싫은 일을 하지 말라’라고 했지만 장수라는 것이 필경 그렇다. 달콤했던 미련으로 장수를 노린다면 남에게는 폐가 되고, 자신은 결국 인생의 쓴맛을 보게 될 것이다. 쓴디쓴 꼭지인생에 고통을 받기보다는 차라리 살 만한 인생일 때 좀 일찍 멈추자는 생각은 지나친 비관주의라고 나무라겠지만 쓴맛이 시작되기 전에 욕심을 버릴 줄 아는 것이 현명이 아닐까? 세상에는 무조건 오래 사는 사람이 승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오래 살아 남에게 부담을 주고, 추한 모습을 남기는 것이 과연 승자일까?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래 살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이는 낙관주의를 넘어 채울 수 없는 탐욕이 아닐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루라도 더 버텨보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는 것은 쓴 오이꼭지를 버리지 못하는 짓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오이를 먹다가 꼭지를 버리는 것처럼 인생을 스스로 버리거나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흔히 하는 말로 살고 죽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설령 내 마음대로 한다 하더라도 자살은 죄이고, 아직까지는 안락사도 허용되지 않으니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삶에 대한 애착에서 나오는 욕심을 억제하거나 줄일 수는 있어야 품격 있는 노년이라 할 것이다. 먹어보아야 뻔한 오이꼭지 맛, 더 살아보아야 뻔한 노년의 삶, 더구나 요양병원이나 병상에 누워서 자신과 가족을 괴롭혀가며 악착같이 삶에 집착하는 것은 참 딱한 인생이다. 안락사(安樂死)는 종교적으로 죄이고, 아직도 불법이지만 그 뜻은 ‘편안하고 즐겁게 삶을 마감하는 것’이라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성싶다.
요새는 개량 참외나 오이가 나와서 꼭지까지 먹어도 쓰지 않다. 그래서 절묘한 결단을 할 필요조차 없어졌다. 옛날보다 더 오래 살 수 있고, 훨씬 살만해졌다. 그렇더라도 인생의 쓴맛은 오히려 더한 것 같다. 옛날에는 늙은이 대우를 융숭히 받았지만 고령화 시대인 지금은 누구도 늙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있더라도 마지못하거나 차마 어쩌지 못하는 의무감이 작용한 것이다. 그 쓴맛이란 옛날의 오이꼭지보다 더하다. 만약에 노년의 쓴맛을 모른다면 아마도 나이가 들어 혀의 감각신경이 무뎌져서일 것이다. 남이야 뭐라건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고 호언한다면 눈멀고, 귀먹은 불통의 꼰대가 틀림없다.
주변에 장수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중에는 내가 평생 존경해오던 분들도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드시니 옛날의 존경스럽던 모습들은 점차 사라지고 점점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눈과 귀가 어두워지고, 사고력이 떨어지다 보니 사철하고 명철했던 분도 언행이 전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은 칠십밖에 살아보지 못한 나를 보아도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있어도 존경하던 분들이 그런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다. 심한 경우는 치매에 걸린 분도 있어 옛날의 존경심을 허무하게 한다. 차라리 좀더 일찍 돌아가셨다면 아름다움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니 그 장수가 오히려 안타깝다. 그런 분들도 그렇거늘 하물며 나같이 바탕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 나이 먹으면 더 가관일 것이다. 허망하게 늙어버린 노인들을 보면서 나는 그런 추한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다짐해 본다.
이제 남은 여생은 십중팔구 쓴 꼭지일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지금’이 최고의 시간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래도 봐줄 만한 모습으로 떠나면 가상한 인간으로 남겨지겠지만 장수를 탐하다가 흉한 몰골로 죽는다면 그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마저도 잠깐이겠지만 조금 일찍 죽더라도 그립고 아쉬워하는 모습으로 남고 싶다. 여생은 계륵(鷄肋)과 같아서 더 이상 집착할 가치가 없을 것 같다. 그것을 맛있는 ‘춘천닭갈비’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나이 들어 무뎌진 감각과 판단력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섭리라 해도 젊은이들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살고 죽는 것을 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제 노년은 오이꼭지와 같은 처지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살자. 꼭지가 아까워서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은 딱한 욕심이다. ‘즐겁고 우아한 노년’을 장담하는 노인들이 많지만 여간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쓴 꼭지’를 면하기 어렵다. 내 입맛이 쓸진대 가까운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苦盡甘來(고진감래)- 고통이 지나면 행복이 온다면 좋겠지만 그건 젊은이들 얘기이고, 이제는 興盡悲來(흥진비래)- 좋은 시절이 지나면 쓰디쓴 노년이 올 일만 남았다면 오래 사는 것이 능사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