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우리의 역사

by 김성수

檀君단군의 檀은 木의 뜻에 亶단의 음을 합한 形聲형성글자이다. 박달나무는 檀君이 神檀樹신단수에 내려왔다는 신화에서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나무가 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壇君단군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壇단은 제단이다. 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제정일치시대의 제사장이자 군주였다. 단군신화를 역사적 事實사실로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사적 의미마저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史實사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단군신화를 잘 살펴보면 事實여부를 떠나서 우리 민족의 의미 있는 역사적 史實과 꿈을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처음 나타나는 단군신화에 의하면 단군이 도읍한 곳은 太白山, 浿水패수에 있는 王儉城왕검성이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 주석을 붙이기를 태백산은 묘향산, 패수는 대동강, 왕검성은 평양이라고 했다. 생각건대, 이러한 주석은 고려시대에 새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이 무슨 근거를 가지고 하는 말도 아니고, 그저 단군의 왕검성, 패수가 고려의 영역임을 확실히 하자는 고려인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몽고가 내려오면서 단군의 행적이 평양에서 구월산 장당경으로, 다시 강화도 마니산으로 옮겨간 것은 몽고에 밀린 고려의 국경이동과 일치한다. 고구려, 고조선의 영토를 모두 잃어버린 고려로서는 단군의 聖地성지를 이민족에게 빼앗겨 이제는 갈 수 없는 만주로부터 그 성지를 현실적인 영토 안으로 모셔 와야 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고조선의 단군으로부터 고구려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민족의 정통성을 고려에 연결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단군신화가 고조선과 고구려의 신화였고, 당시의 중심무대는 만주였으므로 神市, 왕검성, 패수는 당연히 만주에 있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가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면 더욱 그래야 옳다. 그런데 고려의 小我的소아적 역사관에 의해서 단군의 聖地는 원래 자리하고 있었던 만주로부터 반도 안으로 후퇴했고, 역사의 판도는 축소왜곡되고 말았던 것이다. 민족주의자였던 一然이 고려의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해 지었던 <삼국유사>의 檀君紀단군기가 오히려 민족역사의 축소적 왜곡에 앞장섰던 아이러니였다. 단군신화가 사실이건 아니건, 변질된 것이건 아니건, 이제 고려의 편협한 역사관에서 벗어나 한민족의 역사관으로 안목을 넓혀야 한다. 왜냐하면 신화에는 우리 민족의 꿈과 이상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신화가 없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군신화가 사실이냐 아니냐보다는 신화 속에 들어있는 민족의 얼이 중요하다. 일부 종교집단에서 단군신화를 폄하하고 훼손하는 일이 많은데 이는 신화의 의미를 잘 모르는 편협한 짓이다.


이에 반하여 箕子朝鮮說기자조선설은 事實은 물론 史實도 아닌 역사의 날조이다. <史記>에 箕子는 '殷은의 충신으로 周나라 王이 그를 조선에 封봉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중국역사에서도 箕子라는 인물의 실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판에 이것을 근거로 하여 꾸며진 箕子朝鮮說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우리는 平壤평양을 기자조선의 도성 箕城기성이라고까지 하여 역사적 실체인 것처럼 꾸미기도 하였다. 중국의 기록에도 없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자작극임을 말한다. <史記>에 漢 武帝 때에 衛滿朝鮮위만조선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것은 사실로 인정하더라도 箕子朝鮮이란 근거 없는 우리의 허구이다. 역사의 기록이란 당대에 가까우라울수록 신뢰할 수 있으니 국적과 관계없이 <삼국유사>보다는 <사기>를 존중해야 옳다. 箕子가 실재의 인물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활동했던 곳은 대동강 平壤평양이 아니라 중국의 周나라 山西省에 있는 平陽평양일 가능성이 크다. 平陽은 주나라 수도에서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기자의 묘도 중국에 있으니 그가 한반도 평양에 왔었다는 말은 황당한 우리의 역사날조이다. 그럼에도 일이 이렇게 꾸며진 것은 우연히 平壤과 중국 平陽의 두 지명의 우리 음이 같아서인 듯하다. 아무리 양보해도 당시 周의 영역은 지금의 河北省하북성을 넘을 수 없었으므로 자기들의 영역을 넘어 광활한 遼東요동을 건너 아득히 떨어진 미지의 세계였던 대동강 平壤에 제후를 봉했다는 말은 아재개그에도 미치지 못한다. 설령 그런 기록이 있다하더라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당시에 平壤이라는 지명이 있을 리도 없었고, 있었다 해도 周나라에서는 조선 平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일이었다. 箕子朝鮮說기자조선설은 중국의 역사를 우리 영역에 옮겨 우리의 위상을 높여보려는 사대주의 발상의 산물임에 틀림없다.


漢나라는 朝鮮을 멸하고 그 자리에 漢四郡한사군을 두었다는 기록이 <史記>에 있다. 그러나 그 위치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런데 고조선의 도읍지를 평양으로 정해놓고, 거기에 있지도 않았던 箕子朝鮮을 만들고, 漢四郡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것은 중국도, 일본도 아니라 역시 우리였다. <史記> 朝鮮列傳조선열전을 잘 읽어보면, 漢나라가 고조선과 전쟁을 벌인 곳이 만주 遼河요하유역이고, 거기에 漢四郡을 설치했다고 했으니 한사군은 당연히 만주에 위치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뒤에 한사군을 몰아내고 거기에 건국한 고구려도 도읍지나 주된 활동무대도 만주가 확실하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은 고구려 후반의 일이고, 그때에야 비로소 평양은 도읍지로서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이나 전성기 고구려의 중심지는 평양일 수 없다. 단군, 왕검성, 패수, 한사군, 동명왕, 광개토대왕, 대조영은 응당 만주에 있어야 하고, 이것이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단군신화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한사군의 설치와 고구려, 발해의 건국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므로 착오 없이 기록하고 해석해야 한다. 중국은 있지도 않은 東北工程說동북공정설을 만들어 만주를 중국 역사로 꾸며가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역사가 분명한 만주 고대사를 스스로 포기하는 주장을 그치지 않고 있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분별력 있는 이러한 주장들을 재야사학이라 해서 애써 무시해 버린다. 이스라엘처럼 고대사를 근거로 해서 옛 영토로 돌아가지는 못하더라도 분명한 우리의 역사마저 포기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자학적인 역사왜곡이다. <삼국유사>의 단군신화 주석은 고려인들이 국력 약화에 따른 상실감을 채우려는 보상심리에 의하여 고대사를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인 결과이며, 그래서 스스로의 역사를 초라하게 만든 역사왜곡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관변사가들은 스스로 정통사학임을 내세우면서도 고려인이 가지고 있었던 대의명분도 없이 우리 역사를 왜곡하고 있으니 그 잘못이 더 크다고 할 것이다. 살아있는 역사를 잘못된 기록에 의지하여 고집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학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한 것이라면 역사에 부끄러운 일이다.


역사를 연구하려면 적어도 史書의 원문과 후대에 덧붙여진 주석, 주해를 분별해야 한다. 당대에 써진 原文에 후대의 의도가 더해져 반영된 것이 주석, 주해이다. 주석에는 후대의 주관적 의도가 들어있으므로 원문에 비해 사실적 신뢰도가 떨어진다. 그 주해를 활용하여 없는 사실을 만들어 탐욕스러운 東北工程에 골몰하고 있는 중국에서 우리의 역사왜곡을 본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자기도취적 역사도 문제이지만 자학적 사대사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역사학을 생각하면 속이 쓰려온다. 이상에 대해서는 필자의 <生국문학>에 논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