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와 도토리
제주도의 기후는 육지보다 따뜻해서 식물의 생장 모습도 당연히 다른데 나무도 그렇다. 제주도에 와 보니 도토리를 달고 있는 낯선 나무가 흔한데 육지의 참나무, 갈참나무와는 달리 낙엽이 아니라 상록수이다. 자세히 보면 그 나무의 생김새, 나뭇잎, 열매도 육지의 나무와는 다르다. 육지의 참나무는 두툼한 껍질을 입고 있는데 여기는 춥지 않아서인지 나무의 껍질이 얇다. 그것도 산이 아니라 가로수로, 정원수로 인기가 좋아 도심지에서도 친숙한 나무이다. 11월이 되면 그 열매가 길가에 그득하게 떨어져 있다. 그 모양이 도토리이지만 육지의 상수리나 도토리보다는 대체로 길고 작은 편이다. 육지에서는 도토리묵의 재료로 인기가 좋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길바닥에 널려져 있다. 도토리를 닮아서 호기심이 갔지만 줍는 사람들이 없어서 처음에는 도토리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그것을 줍고 있었다. 반가워서 할머니께 여쭤보니 ‘저밤나무’라고 했다. 처음 듣는 이름이라 궁금한 점이 많았지만 귀가 어두운 노인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인터넷을 찾아봐도 ‘저밤나무’는 없고 ‘구실잣밤나무’만 나와있었는데 열매는 비슷하지만 잎이 달랐다. 또 비슷한 나무에는 ‘종가시나무’가 있었다. 나중에 다른 할머니에게 여쭤보니 역시 저밤나무라고 일러주셨는데 표준어인 잣밤나무나 종가시나무는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저밤나무는 잣밤나무나 종가시나무의 제주도 방언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저밤나무’가 방언이지만 사전에 올라있는 다른 이름보다 더 좋은 이름이 아닌가 한다. 내 생각으로는 그것은 육지의 ‘도토리나무’와 동의어일 것이다. 도토리는 원래 ‘도톨밤’이었다. 도토리라는 말의 형성과정을 추론해 보건대 ‘돝(돼지)’에다가 ‘밤’이 붙어 ‘돼지의 밤’, 즉 ‘돼지가 즐겨 먹는 밤(栗)’ ‘밤만 못한 밤’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 ‘톨’은 ‘돝’에서 ㅌ이 ‘의’에 이어진 소리이고, ‘밤’은 사람도 즐겨 먹는 밤(栗)이다. 밤이 아니면서 밤이라는 말이 뒤에 붙은 것을 보면 도토리가 먹는 음식이었다는 방증일 수도 있겠다. 먹을 것이 모자랐던 옛날에는 훌륭한 구황식품이었다. 뒤에 ‘도톨밤’에서 ‘밤’이 떨어져 나가고, 그 대신 접사 ‘이’가 붙어서 표준말 ‘도토리’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고유어 ‘돝’이 거꾸로 한자인 ‘저(猪)’로 바뀌고, 원래의 밤이 그대로 남아서 ‘저밤’ 즉, ‘돼지밤’이 된 것이라면 육지의 도토리와 똑같은 말이다. 혹은 ‘제밤나무’ ‘조밤나무’라고도 하지만 도토리의 어원을 생각하면 ‘저밤나무’가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도 참나무보다는 밤나무를 더 닮았다. 그런데 '구실잣밤나무'도 흔하게 볼 수 있다. 잣밤나무란 밤꽃처럼 꽃을 피우지만 그 열매는 잣만해서 밤이랄 것도 없으니 구실만 밤나무 같다 해섯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제주에도 산간 고지대에 가면 상수리가 열리는 참나무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보지 못했다. 상수리와 도토리를 다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막상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상수리와 도토리가 잘 구분되지 않는 듯하다. 어떤 곳에서는 상수리는 도토리의 일종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옛날에는 상수리를 ‘상률’이라고 했다. 상은 ‘상수리 橡’이고, 율은 ‘밤 栗’이니 원래는 한자어 이름이다. 橡에 栗이 붙은 이유는 그것이 제사상에도 오르는 고급 과일 밤을 닮아서일 것이다. 실제로 상수리는 묵의 재료로 예부터 인기가 높았다. 도토리건 상수리건 옛날에는 훌륭한 구황식품이었으니 그것이 밤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던 흔적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 이름이 ‘상률’에서 ‘상수리’가 된 내력을 추론해 보면 ‘상률’에 도토리처럼 ‘이’가 붙다 보니 ‘상율이’가 되고, 그 과정에서 ‘율’이 ‘술’로 바뀌었을 것이다. 단어에서 ‘ㅇ’이 소리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ㅅ’으로 바뀌는 경우는 충청, 전라 방언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여우가 ‘여수’, 무우가 ‘무수’, 구유가 ‘구수’ 형님이 ‘성님’이 되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상술’에 도토리처럼 ‘이’가 붙다 보니 지금의 ‘상수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론은 지금도 상수리를 ‘상률이’라고 하는 노인들이 있어 힘을 얻는다. 어원을 생각하면 도토리는 고유어이고, 상수리는 한자어에서 온 말이다. 그렇다면 상수리와 도토리는 다른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말이고, 서로 다른 물건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중국의 인터넷에서는 우리처럼 도토리와 상수리를 구분하지 않고 같이 ‘橡’에 우리가 말하는 상수리와 도토리 비슷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참나무과도 참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 이름도, 나무도, 잎도, 열매도 다 다른데 같은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이다.
제주도민들이 도토리를 내력이 분명치 않은 ‘잣밤나무’라고 하지 않고 ‘저밤나무’라고 부르는 것은 그 나무의 의미를 담고 있어서 훨씬 좋은 이름이다. 그리고 ‘저밤나무’에서 우리 고유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서 반갑다. 제주의 방언에는 이처럼 소중한 우리의 숨결이 숨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방언과 지명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거기에는 제주인의 감정과 의식이 배어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