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나무가 많아서인지 새들도 많다. 나무가 많기로는 육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여기는 상록수들이라 새들에게 그늘과 은신처를 만들어 주어서 새가 더 많은지도 모른다. 나무 곁을 지나가다 보면 나뭇잎에 가려 새는 보이지 않지만 그 소리가 가득해서 시끄러울 정도이다. 그런데 길 가는 이의 마음까지 즐겁게 하는 이 유쾌한 새 소리를 우리는 늘 새가 운다고 말해왔다. 그래서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 그리워 운대요’라고 노래했다. 물론 새도 감정이 있으므로 울 때도 있겠지만 새가 소리를 낸다고 늘 눈물을 흘려가며 운다고 한다면 새가 너무 슬픈 일이다. 그렇게 듣는 사람도 역시 그런 감상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새가 소리를 내면 아침이건 저녁이건 운다고 말해왔다. 지금 사람들은 새가 노래한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영어를 열심히 배운 새로운 언어일 것이다. 영어에서는 새가 울지 않고 늘 노래를 한다고 했으니 새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같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제주 상록수 숲에서 나는 새소리는 울음소리가 아니라 틀림없이 즐거운 노래소리로 들린다. 아무리 들어봐도 배가 고프거나 집이 없어서 우는 것 같지 않은 것이 제주의 새 소리이다. 나뭇잎이 빽빽하고 열매가 지천인데 집이 없거나 배가 고플 리가 없다. 어쩌면 내가 울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거나 기분이 우울하지 않아서일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겨울의 녹음 속 여기저기에서 울려 퍼지는 새소리를 울음소리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관주의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새소리를 덮어놓고 운다고 하는 표현은 우리만의 사정일 것 같다. 서양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새소리를 ‘Sing’이라고 하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Crying’이라고 하지 않는다. 중국인들도 새가 운다(哭)라고 하기보다는 노래한다(歌)라고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나깨나 새가 운다라고 했을까? 우리 민족은 한이 많은 민족이라서 그렇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근거 없는 그런 말이 그럴 듯하게 들렸다는 것은 나도 한이 많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우리 민족이 시련이 많고, 잦은 외침과 폭정에 시달렸다고 해도 새 소리마저 모두 울음소리로 들렸다면 세상의 모든 소리마저 그렇게 들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 특유의 신바람이나 유머, 해학도 다른 어떤 민족보다 모자람이 없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자학적이다. 더구나 우리 국민의 노래 수준이야 세계적이다. 세계적인 성악가를 배출했다든지 살벌한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노래방에 가서 목을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들이다. 그러니 ‘한 많은 민족이라 새들마저 울어야 했다’는 말은 그야말로 일제의 식민사관의 농간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그냥 넘기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도 새가 늘 울어야 했는지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이는 우리의 언어습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새가 ‘운다’라는 말은 원래 두 가지 뜻이 있었다. 하나는 ‘울다’이고, 또 하나는 ‘울리다’이다. ‘울다’는 스스로 우는 자동사이고, ‘울리다’는 울게 하는 사동사이다. ‘울다’ 한자로 나타내면 哭(곡), 泣(읍)이고, ‘울리다’는 鳴(명), 響(향), 즉 ‘울림’이다. ‘울리다’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사물의 우렁찬 소리요, 은은한 진동이다. 같은 ‘울다’이지만 그 의미는 이렇게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哭도 ‘울 곡’, 鳴도 ‘울 명’이라고 하다 보니 그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말로 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더구나 ‘울 鳴’자는 ‘입 口’ ‘새 鳥’가 합해서 이루어진 會意(회의) 글자이니 ‘운다’라는 말은 바로 새소리에서 비롯된 글자이다. 그런데 새의 멀쩡한 울림은 물론 즐거운 노래 소리마저 ‘운다’라고 표현했으니 우리의 새는 자나깨나 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짝을 찾아 구애하는 수컷의 새소리가 눈물을 짜는 소리였을 리 없다. 넘치는 기쁨과 황홀한 사랑을 속삭이는 새가 징징댔을 리 없다. 먹이를 찾는 새가 그때마다 배가 고파서 울었다고 한다면 청승맞은 엄살이다. 소리로써 의사소통을 하는 새가 항상 눈물을 흘릴 리가 없건만 우리는 늘 ‘운다’라고 말해온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언어습관에서 온 착오일 것이다.
우리의 새가 늘 울어온 이유는 우리의 심사가 그래서도 아니고, 우리의 역사가 그렇게 슬퍼서도 아닐 것이다. 더구나 명실상부 선진국에 들어선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된다. 설령 민족분단과 고약한 강대국에 시달린다 해도, OECD국가 중에 자살률이 가장 높다 해도, 인구절벽과 환경파괴에 암담한 우리의 앞날이라 해도, 코로나에 울고 싶을 때가 더 많더라도, 최악의 대통령을 뽑을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정국이라 해도 우리는 물론 새들도 늘 울기만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새가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유는 그저 우리의 언어가 ‘울다’와 ‘울리다’가 의미의 구분이 없어서일 뿐이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울다와 울리다를 구분하는 언어를 찾아야 할 것이다. 우선 새부터 울기보다는 노래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육지에서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건만 제주의 상록수 숲을 걷다가 즐겁고, 요란스러운 새소리를 듣다보니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