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백 살을 산다 해도 칠십이면 죽음이 가깝다. 이제 길어 봐야 30년이고, 짧다면 내일일 수도 있다. 설마 내일은 아니겠지만 평균수명으로 말하면 나의 여생은 십여 년일 가능성이 많다. 여생이 십여 년이라 해서 서운할 필요가 없다. 고희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나머지 인생이야 덤으로 받은 여벌이다. 덤이 더 많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이다. 그리고 그 덤은 하늘로부터 받은 게 아니라 의사한테 억지로 받은 덤이다. 쉽게 말하면 칠십 이후는 옛날에는 죽은 목숨이었다. 하늘로부터 받은 삶이 生命이요, 인간에게 받은 삶은 人命이다. 生命이란 말에는 생기(生氣)가 있지만 人命에는 生氣가 없다. 生氣란 그저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살아있는 기운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덤으로 받은 나머지 인생을 삶의 연장으로 생각하느냐, 죽음의 준비 기간으로 삼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질 것이다.
사람들은 나머지 인생을 더 잘 살아보려고 Well Being을 찾아다니기에 바쁘다. 그러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Well Dying으로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지만 그때는 이미 편안한 죽음을 맞기에는 너무 짧은 여생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마저 거부하고 Well Being에 매달리다가 산소호흡기를 달고 인사불성이 되어 Well Dying의 기회마저 놓쳐버리기도 한다. 칠십이 넘어서도 ‘적어도 삼십 년’을 장담하지만 누가 보아도 죽을 날이 멀지 않다. 죽는다는 것은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죽음이 새로운 삶의 출발이라고- 아니면 허무한 소멸이라고 말이 많지만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악착같이 살아온 삶은 무엇이며, 남은 여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기에 아무렇게나 여생을 보내거나, 살아생전 못해본 쾌락을 실컷 누려 본다면 과연 행복한 인생일까?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장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나마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살아있는 한 사는 의미가 있어야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살아서 남의 걸림돌이 되어서야 죽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Well Aging이라는 말도 있을 법하다. 나이가 들면 그에 걸맞은 나잇값을 하자는 의미이다.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정하면 그럴수록 인생은 더 허무하고, 초라하고, 한을 더 크게 할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라면 그나마 삶의 의미를 더 크게 해야 할 것이고, 그렇기 위해서는 죽음 후에도 나의 존재를 연속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것이 인생을 더 인생답게 하는 길이고, 나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길이지 않을까? Well Being이 좋지만 그것은 젊었을 때의 일이다. Well Dying도 좋지만 그것은 너무 조급한 마무리이다. 오래 사는 것도 능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둘러 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칠십이 넘었으면 이제 Well Aging으로 여유 있게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야구에서 마무리를 Save라고 한다. 앞에서 벌어 놓은 점수를 지켜내는 것이 구원투수의 역할이다. 그러나 덤으로 받은 인생을 지키기에 골몰한다면 마무리 투수처럼 초긴장 속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까지 마무리 투수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Saving에는 ‘쌓다.’ ‘저축하다’라는 뜻도 있다. 삶의 막바지에서 더 채우려 한다면 마무리 투수보다 더 긴장된 여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인생의 마무리를 Well Ending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nding은 깔끔하고 간결해야 좋다. 소설의 결말이 길고 지루하다면 결말답지 않고, 소설 전체를 망가트리기 쉽다. 인생의 Ending을 깔끔하고 간결하게 하는 비결은 덜어내고, 버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풍성한 인생은 아니었더라도 인생의 마무리는 간결하고, 깔끔하게 하고 싶다. 마무리 투수처럼 승리는 남에게 주고, 나는 Save가 아니라 Well Ending을 하고 싶다.
저녁에 헤어질 때면 Good night, Good Evening이라고 인사하듯이 이 나이쯤 되면 Good Ending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다.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면 죽음을 늘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죽음에도 의연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에 의연하려면 죽음이 두렵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지금 같아서야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 있을까만 덤으로 받은 십여 년을 죽음의 준비에 힘쓴다면 ‘의연한 척’까지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잔망스럽고 비관적이라고 하겠지만 하늘로부터 받은 生命을 누렸으면 이제 더 이상 人命에 대한 욕심을 버린다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경지에 이르기에 십 년이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이지 않을까 싶다. ‘십 년’도 길다. ‘십’에서 ‘ㅂ’을 탈락시키면 ‘시년’이 되고, ‘ㅂ’의 제한이 없어지니 시간의 제약을 넘어 십 년이 좀 넘어도, 모자라도 괜찮을 것 같다. 이제 ‘시년’만 살다 가자. 나이 칠십이 되어도 여전히 의문은 많지만 그 정도 살다 보면 언제인가는 이런 의문도 줄어들 날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살고 싶기에 아직은 저녁인사도 ‘Good night’보다는 이왕이면 ‘Good Evening’이 더 좋지 않을까 한다. 아직은 자리에 눕기 전에 무언가 할 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