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by 김성수

부끄러운 일이지만 역사적인 명저인 <난중일기>를 이번에야 처음 완독했다. '역사적인 명저'라는 표현이 송구스러울 만큼 <난중일기>는 국민으로서, 후손으로서 반드시 정독하고 가슴에 새겨야 마땅한 민족의 사표이다. 그러한 민족의 유산을 이제야 처음 읽었으니 후손으로서 참 부끄러운 일이다.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던 대로 충무공의 애국, 애족, 충성, 효성은 물론 뛰어난 전략가였음을 실감하였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아직도 <난중일기>를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충무공에 대한 얘기를 몇 가지 덧붙이고 싶다.


충무공은 왜군으로부터 뺏어온 조총을 보고 그에 못지않은 성능으로 만들어 전력으로 활용하였다. 모방이지만 어지간한 기술과 노력이 아니고서는 총신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니 그의 투철한 애국심과 집념, 그리고 총통을 만들어 낸 기술적 바탕이 아니고서는 안 될 일이었다. 또한 거북선은 물론 끊임없이 전투함을 만들어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일을 직접 챙기고, 수시로 갈대를 베어 전쟁에 대비하였다. 군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나라의 눈을 피해 둔전을 개간하였다. 큰 솥을 만들어 군사를 배불리 먹이는 데 힘을 기울이고, 그것으로 소금을 구워 군수에 대비했다. 갖은 위협과 방해를 무릅쓰고 자체로 무과 과거를 시행하여 전력을 충실히 하였다. 나라에서는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을 때 그는 국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왜의 침략에 대비하였기 때문에 백전불패의 전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렇기에 충무공은 민족의 영웅이요, 구원자가 될 수 있었다.


충무공은 적어도 전쟁에 있어서는 인자한 장군이 아니었다. 그는 군령을 어지럽히거나 어긴 자에 대해서는 엄벌하였다. 수십 도에 이르는 곤장을 치는 것은 물론 목을 베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척후병, 정보원을 용의주도하게 운용하여 적군의 동태파악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군사들에게 급료를 지급하여 사기를 북돋웠다. 군용 쇠를 바치는 천민에 대해서는 면천을 시켜주기도 했다. 전투에서 항상 이길 수 있었고,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충무공은 유별난 애주가요, 호주가였다. 그렇기에 술을 바치고, 술단지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때마다 즐겨 통음하였다. 그래서 술 병도 많이 났지만 낮술도 즐겨 공무 중에도 쓰러져 잠들었다고 스스럼없이 일기에 적고 있다. 억울하게 파직당하고, 다시 백의종군하는 길에서 백성들이 술 동이를 바쳤다는 기록은 그가 얼마나 술을 즐겼는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래도 활을 쏘는 날이 술 마시는 날보다 더 많았다. 충무공은 아프지 않은 날을 빼고는 거의 매일 활을 쏘았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부하들을 데리고 활쏘기 시합을 벌인 것은 취미가 아니라 전투력 증강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의 일과 중에 활쏘기 말고는 술 마시는 일이 제일 많았던 듯하다.


술 말고서도 그는 식도락가였다. 전쟁 통에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소고기, 돼지고기를 바쳤다는 기록이 많은 걸 보면 그가 유별난 미식가였을 것 같다. 술과 고기를 가져오면 별로 사양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충무공의 건강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늘 땀을 많이 흘리는 다한증에 시달렸고, 잔병치레를 자주 했다. 그래서 기름진 고기로 몸보신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가운데에서도 술을 즐긴 것을 보면 애주와 영양보충 사이에서 고민도 많았을 것 같다.


<난중일기>에는 혼자 점치기를 자주 하고, 꿈 얘기를 자주 적고 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괘를 짚어 점을 쳐서 앞일을 예견하고, 꿈을 꾸면 거기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꿈 이야기 중에는 첩이 생남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대로라면 그도 첩이 따로 있었다는 말이 된다.


<난중일기>는 매우 솔직한 일기이다. 물론 일기는 솔직해야 되지만 고관, 장군, 유명인사로 솔직하게 일기를 적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품위에 손상이 갈 만한 일도 거침없이 적고 있다. 심지어는 계집종과 같이 잤다는 기록도 있다. 두 차례밖에 되지 않지만 보통 사람으로서는 그런 일은 감추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는 따로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원균을 미워하고, 흠집을 잡은 일도 자주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군사들에게 굴욕을 당한 일도 다 기록하고 있다. 고향에 많은 제물을 보낸 것도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다. 선산 제사 때에 그가 보낸 제사음식을 얻어먹으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이백 명이 넘어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는 내용도 있는 것을 보면 그 제물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공휴일이 따로 없었던 옛날에는 제삿날이 곧 휴무일이었다. 나라의 제삿날은 물론 자신의 제삿날에도 공무를 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난중일기를 신뢰할 수 있는 이유이다.


전쟁이 길어지다 보니 적에게 빌붙거나 항복한 우리 백성 군인들도 많고, 우리에게 귀순, 항복하고 협조한 왜군도 많았다. 그중에는 이중첩자도 있었고, 변절자도 있었다. 충무공은 이들을 적절히 대우하고 전투에 십분 활용하였다. 왜군들이 우리 복장을 하고 노략질한 일도 있었고, 우리 백성이 왜군 행색으로 그 짓을 한 일도 있었다.


아들이 한 말이라고 하는데 요동에 사는 고려 후손 왕작덕이라는 사람이 모국을 구하기 위해서 군사를 일으키려 한다는 기록도 있다. 실제로 군사를 끌고 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슴 뿌듯한 말이다. 이에 대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난중일기>에 원균에 대한 기록이 자주 나오고 있는데 그런 형편없는 장수를 방관한 나라의 처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원균에 대한 충무공의 기록이 꼭 옳은 것은 아니겠지만 원균은 무능한 장수였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그런 무능한 장수가 그리 장수할 수 있었는지 참 궁금하다. 아마도 원균을 비호한 정치세력이 있어서이겠지만 나라가 위험한 전쟁 중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보면 정치란 참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전시작전권을 포기하고서도, 선제타격을 호언하는 요즈음의 정치인, 군인들이 전쟁이 나면 어떤 행동을 할지 궁금하다. 도성을 버리고 압록강까지 혼비백산하여 도망친 임금 선조와 얼마나 다를지 모르겠지만 이승만 대통령을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4백 년도 넘은 선조의 행적은 잘 기억하면서도 불과 칠십 년 전에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라고 큰소리 치다가 졸지에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부산도 모자라 태평양을 건너 도망쳤던 대통령을 기억하는 국민은 많지 않으니 놀라운 일이다. 채상병 사건을 보면 우리 정객들이나 군대가 얼마나 부패무능한지 알 수 있다. 팔짱끼고 정치인들만 욕한다고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 국민이 역사를 기억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지각이 있어야 어중이떠중이 정치인들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난중일기>를 이제야 읽고 왈가왈부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일도 있거니와 이제라도 국민으로서 <난중일기>를 필독하는 것은 충무공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하는 것이고, 나아가 정체성을 잃어가는 국민들의 정신자세를 바로 잡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聖雄(성웅) 이외의 이면을 밝힌다는 것은 충무공의 존엄을 훼손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충무공의 인간적인 면도 살펴보는 것이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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