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론

by 김성수

의사나 영양학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하루 세 끼 식사를 충실히 챙겨먹는 것이 건강의 기본처럼 말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지금도 애기는 먹는 것에 일정한 횟수가 없으며, 병들거나 늙어 기운이 떨어져도 마찬가지인 걸 보면 세 끼 밥이 필연은 아닐 것 같다. 사실 우리 식단은 원래 아침과 저녁 두 끼 위주였다고 한다. 낮에 먹는 點心(점심)은 글자 그대로 '가슴에 점을 찍는' 정도로 가벼운 간식 정도여서 끼에도 들어가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한자에도 드러나 있다. 그나마 흉년이 들면 하루 한 끼도 먹기 버거웠다. 그러던 것이 근래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고, 서구의 영향으로 세 끼로 굳어졌다고 한다. 그들도 원래 세 끼가 아니라 에디슨이 자신의 발명품 토스터를 팔기 위해서 자기는 세 끼를 먹는다고 거짓말을 한 게 三食의 시작이었다고 하니 '세끼 식사'는 생각만큼 오랜 얘기가 아니다.


세끼에는 셋, 三이란 숫자가 주는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이 작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삼세 번’이라는 말을 하기 좋아한다. 한둘은 너무 적고, 네다섯은 너무 많으니 셋이 가장 적당하다는 일종의 타협 의식이다. 그래서 事無三不成(사무삼불성)- 일은 세 번은 시도해야 이루어지고, 事不過三(사불과삼)- 세 번 이상 실패하면 안 된다는 격언도 있었다. 一日三省(일일삼성), 하루 세 번 반성하라고 했고, 三綱(삼강), 三從(삼종)이 인륜도덕의 근간이었다. 고대의 솥도 三발이었고, 삼발이 솥으로 안정된 모양새를 鼎立(정립)이라고 했다. 천주교에선 하루 세 번 종소리에 맞춰 三鐘(삼종)기도를 드렸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 중에 밥도 세 번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결혼까지도 세 번하고, 음주운전이나 입학시험도 삼수(三修)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 한 번으로도 족한 일들이다.


어쨌든 하루 세 끼를 꼭 먹어야 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더 먹을 수도 있고, 덜 먹을 수도 있으니 거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젊었을 때는 점심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배가 고파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지만 나이를 먹고 보니 세 끼 밥 먹기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운동량은 줄고, 소화기능은 약해지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때가 되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가혹한 말도 있지만 하는 일이 없으니 식욕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더구나 배가 고프지 않다면 구태여 먹을 필요가 없다. 세상에는 굶어죽는 사람들도 허다한데 ‘세 끼 밥’을 악착같이 챙겨먹는 것은 염치없는 사치가 아닐까 싶다. 먹는 즐거움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食事란 말은 글자 그대로 먹는 일일 뿐이다. 설령 세 끼를 다 챙기지 못하여 건강을 해치더라도 소화제를 먹어가며 억지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렇잖아도 두 끼 먹기 바쁜 노인들도 적지 않다면 이런 생각도 행복한 걱정이다.


금년 들어 장고 끝에 과감하게 점심을 건너뛰기로 했다. 늙은이는 밥심으로 산다고 하지만 늦은 아침을 먹고, 이른 저녁을 먹으니 밥맛이 좋아지고, 오랜만에 먹는 즐거움이 커졌다. 새벽부터 9시 반까지 빈 속으로 견디려면 허기지는 일이긴 하지만 한층 맑은 정신으로 아침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얻는 것이 적지 않다. 두뇌활동은 배가 비어있을 때에 활발해진다. 배가 부르면 긴장이 풀리고, 사고활동이 둔해진다. 사람이 일을 저지르는 것은 대개 '등 따습고 배부를 때'이다. 예부터 먹는 욕심을 식탐(食貪), 눈 욕심을 색탐(色貪), 명예욕을 예탐(譽貪)이라 했으나 성인이 아니고서야 이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이 중에서 식탐 정도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배고프면 못할 짓이 없다는 말은 할 일 많은 젊은이에 해당하는 말이고, 늙은이는 배가 고프면 정신이 맑아진다. 젊었을 때 사흘을 굶어보아서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뱃속이 비어야 음식에 대한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 수 있다. 같은 세월을 살아도 그런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삶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아닐까?

점심에는 습관상 약간 허기를 느낄 때도 있지만 간단한 간식으로 가볍게 넘길 수 있다. 전에는 열두 시면 점심 먹는데 바쁜 시간을 허둥대야 했지만 이제는 먹는 것에서 해방되어 온전한 자유의 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생략하는 것이 이토록 여유로운지 미처 알지 못했다. 무엇을 하든 내 시간을 끼니 걱정 없이 오직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질이 훨씬 좋아지는 것이다. 끼니를 준비하는 것은 원래 내 몫은 아니었지만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는 것이라서 아주 생색나는 일이 되었다. 얻어먹는 주제에 아내의 1/3의 수고를 덜어 주는 것은 여생을 위한 묘책이 아닐까? 더구나 며느리한테 얻어먹어야 할 처지라면 가히 신의 한 수가 될 것이다. 끼니 걱정 없이 그 시간에 자유로운 활동을 한다면 완전군장을 내려놓은 훈련병이나 글러브를 벗어던진 복싱선수만큼이나 몸이 가벼워진다. 남보다 매일 한 시간이 넘는 시간을 덤으로 얻은 것이다. 게다가 위장과 임플란트에게 이십 분 정도의 휴식을 더 준다면 그만큼 그 수명이 연장될 것이 아닌가?

점심을 건너뛰면 자연히 저녁밥을 기다리게 된다. 서너 시가 되면 뱃속이 비어 정신이 맑아진다. 아침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신활동을 하기에는 좋은 조건이 된다. 육체활동에도 공복은 일의 집중도를 높일 수 있다. 한 끼를 줄이니 몸무게도 1Kg이 줄었지만 몸이 축나는 일은 없는 듯하다. 변소 출입도 줄어 이 삼일 만에 큰일을 보니 에너지 절약효과도 적지 않다. 나이가 들면 알게 되겠지만 대변보는 일이 그리 만만한 공사가 아니다. 만약에 모든 사람이 옛날처럼 두 끼 먹기에 동참한다면 인류의 식량난 해결과 생태환경 개선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근로자나 육체적 활동을 많이 해야 한다면 세 끼도 모자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두 끼 식사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실제로 건강을 위해서 두 끼 먹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끼니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습관과 규칙성이다. 小食은 예로부터 장수의 비결로 꼽혀왔다. 더구나 노인들은 소화기관이 약해졌으니 음식섭취도 줄여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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