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2.

제주는 꽃섬이다.

by 김성수

제주에는 꽃이 유달리 많다. 육지보다 따뜻해서 그렇겠지만 그보다는 제주인들의 꽃 사랑이 더한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제주 신화에는 '西天화원'이라는 유토피아가 자주 등장한다. 바다를 건너 서쪽을 향하여 멀리 가면 꽃의 천지인 서천화원이 있다고 한다. 억울하고 한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찾아가서 꽃을 가져와 소망을 이루는 굿풀이가 많다. 이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제주의 특징적 무속신화인데 거기에 제주인의 유별난 꽃 사랑이 숨어있지 않을까 싶다.


西川은 다분히 불교적인 냄새가 나는데 불교의 극락사상이 무속에 수용된 것이다. 제주를 '절 오백, 당 오백'라고 하지만 신당이 훨씬 많다. '신의 섬'이라고 할만큼 무속이 성행하는 곳이다. 신화 속의 서천의 꽃은 그저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영험한 신통력을 가진 꽃이다.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숨살이꽃, 부러진 뼈도 살려내는 뼈살이꽃, 굳은 피도 녹여내는 피살이꽃, 썩은 살도 살려내는 살살이꽃, 웃음도 살려내는 웃음꽃, 눈물을 뿌리게 하는 울음꽃, 싸움을 하게 하는 싸움꽃, 심지어는 저승에 간 귀신도 데려오는 환생꽃도 있다. 제주인들은 서천에서 가져온 꽃으로 인간의 모든 시련과 고통을 극복하고, 소망을 이루었으니 제주는 단순히 꽃이 많은 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꽃으로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했던 것이다.

신화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제주에는 가는 곳마다 서천의 화원이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동백꽃이 많다. 동백은 가을에서 봄까지 거의 반 년에 걸쳐 끊임없이 꽃을 피워낸다. 겨울이 춥지 않으니 동백이 아니더라도 각종 꽃이 아주 흔하다. 육지에서야 봄이 지나면 꽃을 보기 힘들지만 이곳에서는 사철 꽃을 볼 수 있다. 시내에는 거리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꽃밭에 갖가지 꽃들이 겨울철에도 들어찼다. 아파트나 단독주택에도 유난히 나무와 화단이 많은 것은 제주인들의 꽃사랑이 크기 때문이다. 심지어 텃밭에도 농작물 사이사이로 꽃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 뼘이라도 더 작물을 심어 소출을 늘리려는 육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낭만적인 풍경이다. 좁은 경지면적에서도 발휘되는 여유와 멋은 제주인들의 꽃사랑이 유별남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는 사군자에도 없는 제주의 야생 수선화를 난치듯 그렸는데 그만큼 제주에는 꽃이 많았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동백꽃이나 화원의 꽃들은 모습과는 달리 억지로 코를 갖다대기 전에는 그 향을 맡기 쉽지 않다. 그러니 그냥 보기 좋은 꽃이다.


그런데 오월이면 진한 꽃 향이 길가에는 물론 아파트 방 안에까지 밀려들어 온다. 그 향의 주인은 귤꽃이다. 가을에는 탐스럽게 달려있는 귤나무에 매료되었었는데 지금 보니 그 꽃 향이 또한 이렇게 진할 줄 몰랐다. 귤꽃은 동백꽃처럼 소담스럽거나 화려하지 않다. 미색의 작고, 올망졸망 수줍게 피어있는 꽃이다. 그러나 그 향만큼은 어떤 화려한 꽃보다 강렬하다. 두꺼운 코로나 마스크마저 뚫고 들어오는 꽃 향이 또 있을까 싶다. 지난 겨울에는 은목서 향이 그렇게 짙었으나 여간해서는 찾기 힘든 꽃이어서 아쉬웠다. 귤나무의 은은한 꽃 향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 향을 따라 귤밭으로 가면 매혹적인 그 향에 도저히 발걸음을 떼놓을 수 없다. 아내는 꽃을 찾아다니며 킁킁대는 나를 강아지 같다고 놀려대지만 꽃 향을 즐길 줄 아는 강아지도 드물 것이다.

香자의 禾는 원래 벼가 아니라 '黍'였고, 曰은 '甘'자였다. 香자는 黍 기장, 수수와 甘 달다라는 뜻이 합쳐진 會意글자이다. 그러니까 香의 본래의 뜻은 ‘달콤한 수수 향’이 아니라 ‘달콤한 수수 맛’이었다. 향을 芳이라 해서 지금처럼 ‘꽃향기’로 굳어진 것은 나중의 일이다. 香은 원래 사치스러운 후각이 아니라 ‘절실한 미각’이었던 셈이니 맛과 냄새의 공감각적인 글자였다. 냄새를 전담한 글자는 원래 臭였다. 취는 코(鼻)와 개(犬)가 합쳐진 글자이니 ‘개가 냄새를 맡는다’는 뜻이었다. 냄새로 말하면 개코가 최고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취가 모든 냄새를 나타냈지만 개가 개입되다 보니 ‘악취’라는 뜻으로 굳어져 香과는 뜻이 상반되는 글자가 되었다. 그래서 모든 냄새를 다 말할 수 있는 嗅(후)자를 새로 만들어 후각(嗅覺)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嗅자에 口가 개입된 걸 보면 입과 코는 가깝기도 해서 옛날에는 미각과 후각의 공감각으로 인식되지 않았나 싶다. 어쨌든 香과 嗅가 공감각적인 글자인 것은 우연이 아니고, 臭자에 개(犬)가 개입된 것을 보면 내가 향을 좇아서 꽃에 개코를 들이대는 일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지금 코를 찌르는 귤꽃 향은 단순한 꽃향이 아니라 제주를 먹여살리는 귤의 달콤한 맛이라고 하면 그 향은 더 의미 있는 냄새가 될 것이다. 그래서 코나 즐겁게 하는 다른 꽃향기하고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 성싶다. 그것은 전설의 서천화원의 꽃처럼 제주인들을 살리는 신비한 힘을 가진 향이다. 귤이 색깔과 맛으로 제주를 덮는다면 꽃은 짙은 향기로 제주를 감동시킨다. 그렇다면 제주의 이름을 귤섬, 꽃섬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제주라는 이름은 육지사람들이 '물건너 섬'이라는 의미로 탐라 대신에 새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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