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13

입이 하나요, 귀는 두 개인 이유.

by 김성수

둘레 산책길에 노인 한 분을 만났다. 혼자 앉아 있길래 먼저 말을 걸었더니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몇 마디 대화를 해보니 언행에 빈틈이 없고, 건강해 보여 나이를 물어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보기와는 달리 자그마치 91세라고 한다. 6.25 학도병 참전용사이고, 제대 후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무작정 제주도로 왔는데 그 이유는 겨울에도 노숙이 가능해서라고 했다. 처음엔 타관에서 고생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수성가하여 넉넉한 재산에 자식들이 다 잘 되어서 아쉬움 없는 노년을 보낸다고 했다. 노인답지 않은 총명함에, 지금도 삼각함수 인수분해를 할 수 있고, <맹자> <소학>도 줄줄이 외어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성격도 좋아서 나하고는 20살의 차이가 나지만 그 노인은 거침없이 벗을 하자고 한다. 나도 낯선 객지에서 시간이 남던 차에 이런 노인을 사귄다면 나쁠 것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생각하면 이런 노인한테는 배울 점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타산에 내가 먼저 나서 연락처를 교환하고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약속했다.


이튿날 일찌감치 그 노인한테 전화가 와 있었지만 오전에는 바깥에 잘 나가지 않는지라 그냥 두었다. 그런데 오후에 다시 전화가 와서 받으니 나오지 않겠느냐고 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나가서 만났다. 좀 늦었지만 점심을 사겠다고 해서 극구 사양하니 다방에 가서 차라도 한 잔하자고 했다. 커피점, 까페도 아니고 이름도 아련한 ‘다방’이라고 해서 호기심으로 따라나섰다. 제주도 다방이라? 지금은 자취를 감춘 옛날의 다방이 신기하게도 도처에 있었다. 그러나 노인의 자랑과는 달리 할머니 마담에, 침침한 실내에 커피 맛도 신통치 않아서 얼마 있다가 나왔다. 다시 오고 싶은 옛날의 푸근한 다방은 아니었다. 오는 길에 노인 소유의 건물이라고 보여 주는데 삼 층 건물에 임대료만 해도 일 년 이억은 충분하다고 한다. 이억 타령은 어제부터 몇 번 들었는데 허풍이 아니라는 입증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기 집에도 가자고 해서 또 따라나섰다. 소박한 노인 방에서 앉아서 말하기를 즐겨하는 노인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그 노인의 친절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다. 대개는 자기 자랑이었지만 그래도 참 좋은 노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갈수록 한 말을 자꾸 반복하는 일이 잦아지는 것이었다. 어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아까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자랑하고 싶은 일이 많은가 보다라고도 생각했지만 말할 때마다 처음 하는 말인 줄 안다면 문제가 적지 않다. 같은 말, 그것도 자랑이라면 듣기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남 잘되는 일이 나 잘되는 것만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 한 잔 안 사면서도 자랑을 늘어놓은 사람이 적지 않다. 오늘 이 노인한테 아무리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해도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처음 만나는 나도 이렇다면 같이 사는 가족은 어떨까라고 생각하니 이 집에 들어올 때 며느리의 썩 달갑지 않던 표정이 이해가 되는 듯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마냥 부럽기만 했던 이 노인이 갑자기 측은해졌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건강하고, 암기력도 여전하고, 바둑 장기를 즐기고, 배운 것도 적지 않고, 재산과 자식 복도 많고-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였던 노인네였는데 만난 지 단 이틀 만에 다시 보고 싶지 않다면 같이 사는 가족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기야 노인네가 그러려니 넘기면 나처럼 짜증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하루이틀도 아닌 세월을 부모라고 융숭히 모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풍족해 보이던 노인- 이런 노인이라면 백세장수인들 어떠랴라고 생각했었던 나로서는 한 가지 고민이 더 생겼다. 노인들의 공통점-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습관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한테는 참 괴로운 일이다. 그러니 이런 증상이 시작되는 노인은 마냥 장수를 자랑삼아서는 안 된다.- 이런 노인네 증상을 피하는 비결이 없다면 장수가 그리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잔소리를 줄이고, 특히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단도리해야 한다. 그게 자신이 없으면 말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러려면 말을 하는 시간은 줄이고, 듣는 시간은 늘려야 한다. 옛말에 ‘혀는 내 몸을 상하게 하는 칼날이요, 귀는 내 몸을 지키는 방패’라고 했다.


노파심(老婆心)이라는 말이 있다. 노파는 할머니, 시어미, 혹은 마누라이고 이들의 공통점은 잔소리꾼이라는 것이다. 노파심이란 남녀불문 노인네들의 쓸데없는 걱정, 잔소리이다. 그래도 정신이 맑을 때는 잔소리도 때를 가려서 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한다. 가급적 말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했던 말은 기억하면서 반복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력이 흐려지면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 번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한 말을 여러 번 되뇌이게 된다. 자기로서는 의사를 분명히 해 두자는 심산이지만 상대방으로서는 지겨운 잔소리일 뿐이다. 그러다가 기역력마저 쇠퇴하게 되면 자신이 한 말을 금세 잊어버리고, 그때마다 처음 말하는 줄 알고 잔소리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노인같이 되는데 이런 잔소리는 노인 스스로 외롭게 만드는 화근이다. 입이 하나요, 귀는 두 개인 이유가 있다. 입은 하나이니 천근처럼 무겁게 열고, 귀는 두 개이니 양쪽으로 활짝 열고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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