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風落葉
추풍낙엽이란 말에 익숙해져 있을 만큼 ‘낙엽’하면 으레 가을을 연상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낙엽은 가을의 상징물이 되었고, 곧이어 겨울을 예감하게 되어있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요, 일 년 중 가장 날씨가 좋은 계절이지만 낙엽은 인생의 허무함을 절감하게 하고, 철 있는 사람을 겸손하게도 한다. 저 낙엽처럼 이제 가지를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추운 겨울이 오면 낙엽이건 사람이건 마무리를 해야 한다. 서양에서도 시몬이 밟고 가는 낙엽은 으레 가을이거니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주도에 와서 보니 정작 가을에 낙엽은 볼 수 없었다. 상록수가 많다 보니 가을이 되어도 낙엽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내보이는 나무를 보기 어렵다. 그래서 제주에는 가을이 되어도 낙엽의 쓸쓸함 대신에 수확의 풍성과, 맑은 하늘과, 상록의 싱싱함이 넘쳤다. 낙엽을 밟는 낭만은 없지만 상록수 그늘 길을 걷는 즐거움이 더 컸다. 길바닥을 덮고 있는 낙엽을 쓸어내야 하는 아파트 관리원의 수고도 없고, 공기청소기의 요란한 소음도 없다. 낙엽 없는 가을- 애써 시상을 떠올리려는 궁상이 필요없는 나에게는 그것이 제주도의 신선한 매력이기도 했다.
그런데 봄이 한창인 5월이 되니 길가에 난데없는 낙엽이 구르기 시작했다. 내 머릿속에 굳어 있던 계절 감각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육지 가을의 낙엽처럼 요란스럽지는 않지만 수줍고, 얌전하게 소리 없이 구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제주에는 낙엽 지는 상록수(?)도 적지 않았다. 낙엽이 지니 상록수라는 할 수 없지만 연중 푸른 잎이 나무를 감싸고 있으니 역시 상록수가 아닐까? 다만 희한하게 가을이 아니라 봄에 낙엽이 지는 것이다. 가지 끝으로는 새닢이 먼저 나오고 뒤로는 낙엽이 슬그머니 지니까 나무는 여전히 푸르름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길바닥에는 낙엽이 구르고, 쌓인다. 다만 육지처럼 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 몰골이 아니라 여전히 푸른 상록수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추풍낙엽(秋風落葉)을 당연한 일처럼 생각했던 것은 일종의 편견이었다. 사실은 春風낙엽도 염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태껏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왔다. 그것은 우선 나의 견문이 적고, 우리 국토가 좁은 탓이기도 하다. 그래서 소국 사람들은 생각도 짧지 않을까라는 의심도 해 본다. 봄의 낙엽을 보지 못했기에 춘풍낙엽은 틀린 말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한 오류요, 고정관념이었다. 내가 볼 수 있는 범위에 갇혀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옳고 그름’의 시비에 매몰되어 그와는 다른 ‘다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사실에 어긋나는 현상을 ‘틀리다’라고 하고, 현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다르다’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틀리다’와 ‘다르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많다. 그것은 단순한 어휘력의 결핍이 아니라 사고 능력의 결여이다. ‘틀림’은 옳음(是)이 아닌 그름(非)이다. 그래서 그것은 지양되어야 하고, 시정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다름’은 본질과 나타난 현상이 다를 뿐, 옳고 그름의 시비론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시비의 대상이 아니라 각기 다른 존재요, 존중해야 할 대상이다.
추풍낙엽은 맞고, 춘풍낙엽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틀린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틀린 것과 다른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생각을 애들에게 주입시키고, 강요하면서 평생을 살아왔던 것이다. 엄연히 다르면서도 ‘틀렸다’는 비난을 받은 젊은이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답답했을까? 冬風(동풍)낙엽은 당연한 일이고, 夏風(하풍)낙엽마저도 틀린 것이 아니라 추풍낙엽과 다른 것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세상에 절대로 옳고 그른 일은 얼마나 될까? 분명히 ‘옳고, 그름’은 있는 것이겠지만 세상사 대부분은 ‘다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의 다름을 틀림으로 단정하는 일이 많다. 그리고 자신은 틀림이 없고, 늘 옳다고 믿는다.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니 독단이요, 자신은 옳다고 믿으니 독선이다. 그러니 우리는 늘 독단과 독선으로 사는 셈이다. 이런 독선과 독단으로 벌어지는 현상이 요즈음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내로남불이다. ‘내로남불’은 새로 올 부처님 이름이 아니라 ‘내 탓은 없고, 남 탓’하는 대한민국 정객들의 세계 특허품이다. 앞 정권이 그랬다고 해서 새 정권이 그 짓을 그대로 따라서 한다면 애써 정권을 바꾼 국민이 허탈할 일이다. 민생과 외교의 난제가 산적해 있는데 비리도, 횡령도, 폭정도 없이 물러난 정권을 샅샅이 털어 포토라인에 세우는 데 몰두한다면 어김없는 ‘내로남불’이다. 원전 억제책은 후쿠시마의 끔찍한 재앙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세계적인 추세에 따른 통치행위였지 틀림도, 범법도 아니다. 설령 월북사건이 한 사람의 인권을 말살했다고 하더라도 남북관계는 더 중요한 국익일 수 있다. 패륜으로 몰려 폐위당한 광해군이었지만 그의 실용적 외교정책은 징벌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뿐더러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을 징치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의 명분과 의리의 외교는 참혹한 비극을 자초하였다. 대통령의 통치행위인 원전정책과 월북사건을 범죄로 규정하고 사정의 대상으로 몰아간다면 감옥을 면할 대통령은 없을 것이다. 법치를 내세워 보복정치를 한다면 머잖아 자신도 부메랑을 피할 수 없다. 스스로 만든 법으로 스스로 죽는 작법자폐(作法自斃)의 역사적 교훈을 모른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틀림과 다름이 다르다는 사실을 지금 처음 안 것은 아니지만 제주에 와서 춘풍낙엽을 보고서야 그동안 ‘다름’을 인정하는데 인색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이가 들수록 조심해야 할 일은 고정관념과 편견이다. 인생경험이 많을수록 거기에서 벗어나야 옳건만 제한된 경험을 함부로 일반화시켜 그것을 소신이나 지혜로 착각하기 쉽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노인들보다 더 많이 배워서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건만 오히려 노인들은 알량한 경험만을 가지고 그들의 '다름'을 '틀림'으로 단정하고, 잔소리를 해대고 있으니 꼰대의 고집, 불통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독선과 독단은 분명히 틀린 것이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지혜이다. 코 앞에 닥친 ‘죽음’마저도 끝이 아니라 ‘존재의 다른 양식’이라는 말을 깊이 새겨보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