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바보 2

손주바보는 천상 바보이다.

by 김성수

애들과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손주를 보기 어렵다. 영상통화 덕분에 화면으로나마 자주 볼 수 있지만 체온을 느낄 수 없으니 구두 신고 발바닥 긁기와 다르지 않다. 나도 서운하지만 육아를 도맡아 하는 애들 고생을 생각하면 할애비가 되어 조금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하니 미안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던 차에 육지에 갈 일이 생겼다. 몇 주간의 말미가 있으니 당연히 애들 집에 가서 고 예쁜 손녀를 안아 보아야 한다. 애기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에다 며느리 수고를 덜어 줄 기회가 왔다 싶어 가급적 서울에 오래 머물 궁리를 해 보았다. 그래서 아들과 내 일정을 미리 상의하는 중에 무언가 심상치 않게 집히는 것이 있었다. 내가 서울에 오래 머무르는 것에 썩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그래서 아내와 상의를 해 보고 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내 생각과는 전혀 달리 노인네가 애들 집에 오래 머무른다는 사실 자체가 애들한테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니더라도 할머니가 애를 돌보아 주고, 잠시나마 살림도 해 주는 것이 며느리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참에 나도 어물쩍 마누라 덕을 보자는 심산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아내의 말이 미심쩍어 딸애한테 확인해 보니 내가 얼마나 엉뚱하고, 어리석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손주야 할애비 할머닌들 어떠랴만 며느리로서는 시부모가 애기를 봐주는 고마움보다 시부모와 같이 여러 날을 같이 있어야 하는 부담이 훨씬 큰 것이었다. 내 자식이 고약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자식들이 다 그런 것이라니 나는 세상 물정을 한참 모르는 주책바가지요, 푼수였던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밖에- 세상의 노인들이 얼마나 이처럼 어리석은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가? 그러면서도 노인들은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면서 살고 있으니 참 가관이다. 사람이 대개 그렇지만 특히 노인은 자신의 처지를 전혀 모르고 살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다른 노인네들보다는 좀 철이 있는 편이라는 자부심을 숨겨두고 살아왔다.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점잖게 노인들이 좀더 현명해지기를 말해 왔다.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우지 말고 젊은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자고- 자신들의 고정관념, 고집, 가치관에서 벗어나 젊은이들의 사고와 가치관에 맞춰가며 살자고- 시대에 걸맞지 않은 경노사상, 권위의식, 보상의식, 시혜의식, 라떼타령-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노인의 행복추구권이나 생존권마저 당당히 내세울 시대가 아니라는 점도 강조해 왔다. 노인의 장수나 행복이 젊은이와 같이 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배치되는 일이 더 많다면 그 장수나 행복은 한낱 욕심일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그래서 젊은이들한테는 얼마나 지지를 받았는지도 모르지만 노인들한테는 은근한 반발과 비웃음도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자식들 처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적지 않은 부담감을 주어왔으니 참으로 체신없는 짓을 해온 셈이다. 그러니 전에도 이런 일이 적지 않았을 것이며, 앞으로도 이런 일이 얼마나 더 일어날지 짐작할 수 없는 일이다.


정말 큰 문제는 이런 간단한 이치도 모르면서 나는 다른 노인들보다는 더 현명한 축에 들 것이란 터무니없는 망상이다. 이런 착각은 대체 언제쯤이나 버릴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은 나이가 들수록 소갈머리가 점점 줄어들어 이런 착각이 더 심해지는 일이다. 좁아지는 소갈머리는 생각 못하고, 고지혈증이나 고혈압, 혈관만 걱정하고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그리고 또 어김없는 사실은 지금 손주를 아무리 들여다 본들 어린 것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니 내 욕심일 뿐이다. 아이가 성장하면 할애비를 대단치 않게 여길 것이니 그때에는 영락없이 서운한 마음이 클 것이다. 그리고 이 애가 더 크면 나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니 손주바보는 아무래도 천상- 바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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