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포 이야기
손목시계 건전지를 바꾸러 시계포에 갔다. 금은보석집에서 시계도 취급하는 가게였는데 그리 크지 않은 곳이라 주인 혼자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주인은 시계에는 그리 능숙하지 않았는지 한참 시계를 만지더니 5백 원짜리 동전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없다고 했더니 동전 바꾸러 간다고 잠깐 여기에서 기다리란다. 얼핏 생각에 귀중품이 가득한 가게를 나에게 맡겨놓고 나간다니 내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나를 믿어주는 마음은 고마웠으나 낯선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고 농담 삼아 말했더니 그제야 순진하게 웃으면서 수긍하였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미안하지만 동전을 바꿔 오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제안하였다. 노인 고객이 연하의 가게 주인 심부름을 가야 할 판이라 황당하기도 했지만 순진한 주인에게 감동이 되어 그 제안을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주인은 만 원짜리를 주면서 먹고 싶은 것 사고 동전을 거슬러오라고 한다. 별 수없이 오늘은 별 희한한 일이 다 있다고 꿍시렁대면서 한참을 걸어서 편의점을 찾아가자니 웃음마저 나왔다. 맛있는 것 사 먹으라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어서 한참 골라 제일 싼 생수병을 사고서는 5백 원 동전을 챙겨서 착실하게 심부름을 수행했다. 좀 황당하기는 했지만 결코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처음 온 이 가게에서 느껴보는 이 흐뭇한 기분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미 50대를 넘어선 듯한 여주인이 예뻐서는 아닐 것이다. 가게에 그득한 귀금속들에게 마음이 빼앗겨서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 주인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어서가 아닐까? 나의 첫인상이 귀금속 가게를 내맡길 만큼 좋았다는 것은 얼마나 기뻐해야 할 일인가? 이제는 나도 슬슬 얼굴에 노년의 인격이 잡혀 가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망상이고- 아무리 cctv가 있다 해도 난생처음 보는 나를 믿어 준 그 주인에게 더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아무튼 요 근래 이토록 흐뭇한 기분을 가져본 기억이 별로 없는 듯하다. ‘사장님은 얼굴이 하영 미인이시우다’라면서 가게를 나오니 주인은 여전히 쾌활한 웃음으로 ‘칭잔해 주셔서 고맙수다’라고 대꾸한다. 비록 서로 간에 실없는 농담이었지만 이 정도라면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여기 말고도 제주에서 가게에 들어가서 주인이 없는 경우가 적잖았다. 주인 없는 가게에서 하릴없이 그냥 나온 적도 있었지만 이렇게 가게를 비워놓을 수 있다면 도둑이 없다는 제주 사람들의 인심이 아닐까 싶다. 조금은 무뚝뚝하고 배타적인 듯한 제주 사람들의 말투에는 역설적으로 상대방을 믿는 여유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