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21

귤향(橘香) 이야기

by 김성수

요즈음 제주도에서는 귤향이 가득하다. 제주도에 귤밭이 많은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향이 어떤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제주도에는 꽃이 많지만 귤향을 능가하는 꽃내음은 드물다. 동백꽃은 화려하지만 본래 향이 그리 짙은 편이 못 된다. 귤밭뿐 아니라 길가나 정원에 늘어서 있는 귤꽃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하면 길가는 물론 창문까지 향이 물씬 풍겨온다. 千里香은 귤향보다 꽃향이 훨씬 향기롭다.


香은 코로 느끼는 후각이다. 한자를 보면 벼 ‘禾’에 ‘日’이 모인 글자로 보인다. 벼에 햇볕이 비추면 벼꽃이 피어서 향내가 난다 - 그럴듯한 글자풀이이다. 벼꽃도 꽃이니 그 향도 있을 법하지만 농촌에서 자란 나도 그 향을 맡아본 적은 없다. 그래도 벼꽃이 피는 것만 보아도 흐뭇하니 농부는 향내로 느껴질 법도 한 일이다. 특히 배가 고플수록 그럴 일이다. 소설가 나도향(羅稻香)의 필명은 그런 내력으로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香은 그런 글자가 아니라 기장 ‘黍’자에서 위 ‘禾’만 취하고, 아래에다 ‘甘’자를 합쳐서 만든 글자이다. 원래는 日자가 아니라 甘자였다는 것이다. 한자는 복잡한 글자에서 단순한 글자로 변천해 왔다.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는 그렇게 단순화된 글자이니 본래의 뜻을 많이 상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자가 뜻글자라고 해서 현재 쓰이는 글자만 보고 하는 뜻풀이는 신뢰하기 어렵다. 더구나 중국의 간체자에서는 도무지 뜻이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까 香은 ‘벼가 달다’가 아니라 ‘기장이 맛있다’는 풀이가 맞다. 하기야 기장이나 벼는 다 오곡이었으니 별 차이는 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중국 북방에서는 고대에 벼가 없었으니 기장이 맞을 것이다. 오곡(五穀)에 벼가 들어간 것은 周나라 이후의 일이다. 그러니 공자 시대만 하더라도 중국에서는 벼농사가 없었을 것이다. 만주에 벼농사가 시작된 것도 조선 후기, 우리 이주민들에 의해서이다.


어쨌든 ‘香’은 원래 입 안의 미각(味覺)이었던 것이 후에 코의 후각(嗅覺)으로 옮겨간 것이다. 같은 감각이지만 미각과 시각(視覺)이 더 원초적 감각일 것이다. 우선 눈으로 찾아서 먹는 것은 동물의 원초적 행위이다. 냄새는 배를 채운 뒤에야 작용하는 감각이고, 청각은 눈으로 보기 전에 두뇌활동을 먼저 작동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고등적인 감각이다. 향이 미각에서 후각으로 옮겨진 것은 감각의 발전을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청각이 시각보다 더 상위감각인 것은 눈으로 보는 직감이 아니라 두뇌를 통한 연상(聯想)활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같이 보고서도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은 두뇌활동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현대교육에서 시청각 교육을 능사로 말하지만 모든 것을 보여 주면 두뇌의 연상활동을 둔화시킨다. TV를 바보상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뇌 발달을 위해서는 소리에 의존하는 라디오, 그보다는 문자를 통한 책이 더 효과적이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간접경험보다는 직접경험이 낫다는 말이지만 직접경험에만 의존한다면 문화파급의 한계가 클 수밖에 없다. 문화는 눈으로 보는 직접경험보다는 간접경험인 책과 기록을 통해서 확산되어 왔다. 보고서야 믿는다면 예수부활을 믿지 못한 도마의 부족한 신앙심일 것이고, 또한 불신의 시대를 더 부추기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우를 ‘美’자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선 시각이다. 그러나 美자는 ‘羊’에 ‘大’가 합해진 글자이다. 즉, ‘큰 양’이겠는데 양이 다 자라면 보기에 좋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는 것은 ‘살진 양’을 잡아먹는 미각의 즐거움일 것이다. 그러므로 아름답다는 감각은 원초적 미각에서 먼저 출발한 것이 두뇌활동이 필요한 시각으로 옮아간 것이다. 지금도 중국어에서는 美가 ‘맛있다’와 ‘예쁘다’로 통용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우리 속담에도 ‘보기좋은 떡이 맛도 좋다’고 하지 않는가?


같은 감각의 유사어이면서도 감각의 층위가 다른 경우도 많다. 시각 중에서도 그 의미가 다양한데 예를 들면 視는 단순히 ‘보다’라는 시각이지만 見은 주관적인 견해, 의견으로 단순감각에서 감성, 이성으로 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불교의 觀에 이르면 더 심층적인 의미로 감성, 이성을 넘어선 ‘달관의 경지’를 뜻한다.


나이가 드니 시력도 점점 떨어진다. 그러니 이제는 희미해지는 단순감각에 의존하기보다는 감성, 이성적인 영역을 넓혀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가능하면 가치관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기초감각인 시력이 안 좋아지면 감각의 확산이나 승화가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그래서 치매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다.


귤밭에 가서 애써 코를 벌룸거리면서 성급히 달콤한 귤맛을 연상하는 것은 원초적 감각을 되찾고 싶은 본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왕이면 귤맛이라는 원초적 감각에 의존하기보다는 그것을 이념화, 가치화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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