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길에 광정을 지나다.
下第歸路過廣亭
尹鐘億 1788-1837
終歲田家樂有餘◎ 농가 일 년은 즐거움이 넘쳐나고
雨中荷揷月中鋤◎ 비 맞으며 삽을 메고, 달빛에 김을 맨다.
父母妻孥同一室 부모처자식이 한 방에 같이 자고
生來不讀半行書◎ 평생에 책 한 줄 읽지 않았다.
윤종억은 다산의 제자로서 과거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낙방하여 귀향 중에 공주 광정 농가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습ㄴ다. 낙방의 쓰라림을 안고 농민들을 보니 그들의 삶이 훨씬 행복해 보였습니다. 밤늦게까지 고된 농삿일에 지쳐있지만 그들의 건강한 삶이 오히려 부러웠습니다. 비록 오두막에서 온 식구가 한 방에 모여 살고 있지만 조금도 궁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평생 책 한 권 읽어보지 못한 무식한 농민이지만 가난한 살림에도 부족함 없이 건강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던 것입니다. 평생을 과업에 투신했지만 아직도 낙방거사에 불과한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며 농삿군의 행복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농군의 삶을 ‘樂’ 한 글자로 행복한 삶으로 그려낸 솜씨가 돋보입니다.
終종歲세田전家가樂락有유餘여
終歲 세밑, 田家 농가. 樂有餘 즐거움이 여유가 있다, 넘치다. ‘세밑’이라면 겨울이어야 하는데 삽을 메고 김을 매는 다음 장면으로 보아서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세밑을 ‘농가 일 년’이라고 옮겼습니다. 樂有餘 한 구로 이 시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樂’ 한 글자로 농민의 고초를 행복한 모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으니 탁월한 시어입니다. 한시에서 통상 첫구에서는 주제의 실마리를 세우는 정도이지만 이 시에서는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구조입니다.
雨우中중荷하揷삽月월中중鋤서
雨中 비가 내리다. 비올 때. 荷 메다. 揷 삽. 月中 달빛. 鋤 호미. 비가 내리는데 삽을 메었다면 겨울의 풍경은 아닐 것입니다. 호미로 김을 매는 것은 더구나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앞 앞 구의 終歲를 세밑이라고 옮기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윈작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나 ‘일 년 농사’가 원의에 가까울 것입니다.
父부母모妻처孥노同동一일室실
父母 부모. 妻 아내. 孥 자식. 同一室 같은 방에서 거처하다. 삼대가 한 방에서 잔다는 것은 궁색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눈으로는 궁색함이 아니라 오히려 화목한 가정이요, 행복한 삶의 모습으로 비쳐진 것입니다.
生생來래不불讀독半반行행書서
生來 태어난 이후, 평생. 不讀 읽지 않다, 배운 적이 없다. 讀은 Reading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Study의 의미이다. 半行 반 줄. 조금. 書 글, 책.
그들은 평생 책 한 줄 읽지 못한 무식군이지만 평생 책만 읽어온 자신보다 훨씬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이 한없이 부러운 것입니다. 원작에는 이러한 글자가 없으면서도 주제의식을 충분히 전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한시 구조는 結에서 주제가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여기에서는 주제와는 거리가 멉니다. 지은이가 하고 싶은 말은 가난하고 어렵게 살고, 공부도 한 적이 없지만 오히려 그들의 삶이 건강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전 편에 그런 말은 없지만 독자로 하여금 능히 그런 주제를 짐작할 수 있게 한 솜씨가 돋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