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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May 02. 2024

후회에 대하여 2

후회의 미덕.

   

 후회는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깨달음이나 뉘우침’입니다. 이러한 규정이 맞다면 후회란 

'때늦은’ 점 말고는 잘못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의 옳고 그름은 항상 사후에 판가름이 나는 것이라면 후회는 정당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절실하게 뉘우치고 고쳐나가는 신앙적인 회개(悔改)’라고 하면 오히려 바람직한 행위일 것입니다. 후회와 회개는 잘못을 뉘우친다는 공통점도 있지만 후회는 ‘뒤늦은 깨달음’이고, 회개는 ‘미래지향적 의지’라는 점에서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로 후회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후회없도록’이란 말을 자주 합니다. 특히 원대한 계획이나 포부를 밝힐 때, 격려할 때 그런 말을 자주 합니다. 심지어 후회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인간이 ‘후회없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한계를 가지고 어찌 후회가 없을까? 어찌 생각하면 그것은 오만하거나 객기 넘치는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그것은 기껏 ‘후회 없도록 하려는 노력'일 뿐입니다.


 그렇더라도 후회가 적은 사람일수록 현명하고, 성공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같은 후회를 반복하는 사람은 의지나 능력에 문제가 있어서일 것입니다. 인생을 ‘미로탐색하는 시행착오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후회를 줄이려는 노력은 인간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기도 할 것입니다. 나도 한때는 후회를 줄였다고 자부할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60 이후에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이순(耳順)에 들어섰으니 나도 나잇값을 하나보다라고 착각도 했었습니다. 


 공자만큼이나 살아온 지금 생각해 보니 후회가 줄어들기는커녕 갈수록 늘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한때 후회를 줄였다고 착각을 했을 때에는 스스로 한 짓에 대해서 시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고, 잘못에 대하여 부끄러운 줄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젊었을 때는 내 판단과 행동에 자신이 설 때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나보다 나이가 많고, 지위가 높고, 학식과 인격이 높은 사람들한테도 그랬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내 잘못을 인정하거나 후회하는 일도 많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하고, 무지한 철딱서니였는지 부끄러워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후회가 없거나 적은 사람은 현명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누구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은 양심이 결여되었거나 아예 죄의식이 없는 사이코패스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흉악범들은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한두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위해서 나라와 사회를 망쳐놓은 정치인들 중에도 후회와 반성이 없는 철면피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자들을 뽑아놓고 나라의 운명을 맡겨야 하니 국민은 늘 후회를 해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그러고 보면 후회가 많은 사람이야말로 더 양심적인 사람이 아닐까라는 넉살마저 생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후회가 많은 삶에 다소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불굴의 정열과 투지로 후회없이 살기보다는 부끄럼과 양심으로 살아간 윤동주를 닮고 싶습니다. 

 

그러나 후회스러운 일이 생각날 때마다 가슴이 저려오고,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후회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은 거의 고통에 가깝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시행착오를 줄여 후회도 줄어들 줄 알았었는데 줄기는커녕 늘어만 가니 나이를 헛먹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후회가 많은 것은 실제로 잘못한 일이 많아서일 수도 있지만 뒤늦게 철이 들어서 지난 과오를 이제야 깨닫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후회라는 말이 되지않았을까요? 그렇다면 후회란 일종의 지각이요, 겸손의 미덕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과 교만한 사람은 후회도 할 줄 모릅니다. 그렇다면 후회는 오히려 다행한 일이지 가슴이 저릴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니지 않을까? 

 

  아니면 늙어 후회가 늘어나는 것은 의기소침에서 나온 우울증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노인의 후회는 양심이기에 앞서 하나의 질병일 수도 있겠습니다. 특히 나같이 비관적 성향이거나 심신이 허약한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잃어버린 양심의 회복이거나 미래지향적인 회개(悔改)일지도 모릅니다. 젊었던 시절, 수많은 시행착오를 저질렀는데도 뉘우치기는커녕 기고만장했는데도 지금까지 살아있으니 그것만으로도 天運(천운), 은총이 아닐까? 그러면서도 아직도 잘난 척, 아는 척, 똑똑한 척한다면  죄를 짓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 때늦은 후회에 그치지 말고, 나머지는 회개하며 용서를 청하며 사는 것이 하늘과 인간에 대한 늙은이의 도리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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