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살이
제주살이 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길을 걷다 보면 낯선 차림의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제주살이를 접는다고 선언하는 글을 자주 보게 된다. 최근 제주도의 집값은 물론 월세, 연세값이 떨어진다는데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주살이 불평을 읽어보면 제주사람들의 불친절과 배타성, 높은 물가. 낮은 임금과 일자리 부족이 주요한 이유이다.
섬이라서 일자리가 많지 않다보니 임금이 높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제주는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지역이라 값싼 외국 노동자가 많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힘든 일을 하느니 차라리 놀고먹겠다는 젊은이들이 많아서 벌어지는 기현상이라 속이 편치 않다. 제주사람들의 불친절은 육지사람들에 대한 배타적 감정 때문일 것이다. 제주인들은 오랫동안 육지의 탄압과 지배를 받아 일종의 피해의식 같은 것이 있다. 제주는 탐라국이었다가 고려부터 식민지화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수탈이 더욱 심해지고, 제주도 봉쇄령과 귀양지로 차별대우가 심했다. 해방 후에는 4.3 비극으로 잊힐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육지의 자본과 장사꾼들에게 경제적 침해를 입었다. 그래서 육지인들에 대해서 반감과 적대감 같은 것이 몸에 배어있는 듯하다. 육지사람들에게 제주방언은 투박하고 거칠어서 불친절하게 들릴 때가 많다. 그러나 견디며 몇 마디 더해보면 금세 친절해지는 데에 놀라게 된다. 상대방에게 악의가 없다고 확인되면 제주인들은 매우 진솔한 친절과 인정을 아끼지 않는다. 사람이 다가가도 여유를 부리며 모이를 쪼고 있는 새들에서 제주사람들의 인정을 엿볼 수 있다.
제주의 물가가 높다고 하지만 휘발유, 건축자재, 가구 등 몇 가지만 제외하면 육지보다 비싼 편이 아니다. 당연히 해산물은 싸고, 생각보다 경작지가 많아 농산물도 대체로 싼 편이다. 특히 당근, 무, 양배추, 감자, 더덕 등은 맛이 있으면서도 육지보다 싸다. 제주에 도둑이 없다는 말은 먹을 것이 많아서일 것이다. 난대성 기후라서 다모작(多毛作)을 많이 한다. 육지에서는 사람들이 다람쥐 밥인 도토리를 빼앗아 먹는 바람에 다람쥐가 굶을 지경인데 제주도에는 도토리가 바닥에 쌓여도 돌아보는 다람쥐도 없다. 밭이나 나무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도 남의 물건에 손대는 사람이 없다. 그러고 보면 외지인들의 불평은 타당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제주 도심지에서 살아서가 아닐까 한다. 제주도 관광객들이 바가지 쓴 이야기가 끊이지 않지만 그것은 대개 육지에서 온 장사꾼들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다. 내가 보기에 제주 사람들은 그런 바가지 상술을 잘 모르거니와 장사 수단이 그다지 세련되지도 못했다. 보약을 지으러 건강원에 갔는데 주인이 말하기를 나 같은 사람은 개소주가 체질에 맞이 않는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돈벌이보다 손님 건강을 챙기는 장사꾼도 있구나 싶어 감동이 컸다. 오일장에서 귤을 흥정하는데 어느 것이 더 맛있느냐고 물었더니 이 아즈망 한참 생각하더니 ‘지금은 끝물이라 다 맛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물건 팔 마음이 없고서야 이렇게 솔직하고 어리숙한 장사꾼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사람들이 외지인들에게 터무니 없는 바가지를 씌울 리가 없다.
생각건대 제주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지인들은 여기에서 이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익을 다투다 보니 여기 사람들하고 경쟁이 벌어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적대관계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주도건 육지건 당연히 텃세를 받을 수밖에 없다. 제주인의 배타적 성격은 제주 특유의 ‘괸당정신’과 ‘육지것’에서 비롯된다. 제주인들의 괸당은 오랜 역사 동안 이루어진 제주인의 자기방어적 파당의식이요, 동시에 정체성(正體性)이다. 육지나 해외에 나가있는 제주인들은 지금도 고향을 잊지 않고 기부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제주인의 배타성을 탓하기보다는 제주인들이 겪은 역사적 수난과 그 정체성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었으면 좋겠다.
만약 육지인들이 제주도에 와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부적응의 원인일 수 있다. 섬이라고 해서 조금이라도 깔보는 눈치를 보인다면 당연히 '육지것'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제주인들은 육지인들이 거들먹거리거나 난 체하는 것을 곱게 보지 않는다. 육지에서 무슨 학력이나 경력, 재력을 제주사람들은 묻지도, 인정하려 하지도 않는다. 제주사람들이 육지인에 대하여 쉽게 정을 주지 않는 것은 일종의 피해의식과 얼마 있다가 떠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주 사람들은 명품을 별로 좋아하지도,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실용주의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인들의 실용주의는 관혼상제에서도 잘 나타난다. 결혼식장에서 음식을 먹어가면서 예식이 진행되고, 장례식장에서는 문상(問喪)이 생략되고, 부의금도 본인에게 직접 전달하고, 답례도 상품권으로 직접 받는다. 그러니 부의금을 가지고 상주들끼리 다툴 일도 없다. 낯선 생활문화이지만 생각해 보면 합리적이기도 하다.
원래 내가 제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뛰어난 제주도의 자연환경에 끌려서였다. 그런데 제주도의 자연환경에 대한 매력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아 걱정이다. 깨끗하기만 했던 한라산과 태평양이 미세먼지에 흐려지는 날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처음에는 아침 여명에 한라산 골짜기 계곡 바닥까지 선명하게 보였지만 근래에는 황사와 미세먼지로 흐려진 날이 더 늘어나고 있고, 맑은 날보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이 오히려 더 많아지고 있어 기후 위기를 실감하게 한다. 나이 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런 날씨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다고 걱정한다. 이러한 현상은 제주살이의 매력을 감소시키는 일이다. 이주자로서 바라건대 제주사람들이 괸당정신을 발휘하여 자신의 보물인 제주의 자연환경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노력을 기울여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