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한테 중국은 무엇인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이웃은 중국이다. 그런데 중국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가까이할 수 있는 이웃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멀리 해서도 안 되는 것이 또한 중국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한과 중국은 멀리하고, 태평양 건너 미국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 슬프다. 지정학적 불운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우리의 무지에서 온 결과라면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가까이 하건 멀리 하건, 적이건 우군이건,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저들 말대로 知彼知己지피지기라고 했으니 이웃나라를 백안시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 더불어 G2를 호언하고 있는 중국은 미국만 믿고 데면데면할 나라가 아니다. 더구나 미국의 초강대국 위엄이 흔들리고, 일본이 다시 우리를 무시한다면 중국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아무리 중국이 싫더라도 미국에 의지할 수 없고,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방관할 수는 없다면 언제까지 중국을 적대적으로 대할 수 없다.
이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중국이지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우리가 중국을 이해하는 폭과 깊이는 현저히 떨어진다. 과거에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중국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지금은 막연한 배타심으로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는 언제나 중국을 하나의 관점으로 보려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중국에 대한 이해는 우리의 장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에 대한 이해 없다면 가까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멀리하는 것이 낫다. 현실적으로 미국과 일본은 가까이하기에는 갈수록 부담이 커지고, 중국은 멀리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가깝다. 그러니 중국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對중국 정책입안자들이나 중국에 투입되는 외교관들이 걱정이다. 적어도 대사라면 그 나라의 전문가가 투입되야 하건만 기껏 보상이나 조정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많다.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중국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對중국 관계자들이나 주중 외교관들이 중국어나 중국 역사문화에 대해서 무지한 것을 부끄러워할 줄도 모른다면 나라의 장래를 위험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中國은 원래 천하의 중심이라는 일반명사였지 특정 국가를 말하는 고유 명칭이 아니었으며,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제후들이 할거하여 춘추전국이라는 중국(衆國)을 진시황이 秦진으로 통일한 후 중국은 여러 나라가 통합된 合衆國(합중국)이었다. 중국은 최소한 56개 이상의 소수민족이 모여 이루어진 합중국이다. 유럽 같으면 수십 개의 독립국가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수십 개의 나라가 억지로 한 나라로 합쳐진 나라인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는 분단과 통일을 반복한 이합집산의 역사이다. 중국 26개 왕조 중 秦진, 漢한, 隋수, 唐당, 宋송, 元원, 明명, 淸청 정도가 統一合衆國통일합중국이고, 나머지는 모두 분단의 중국이었다. 합중국 중에서도 元, 淸은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나라였고, 나머지도 중국이 말하던 이른바 오랑캐 야만인들이 주축이었으니 중국 역사의 절반 이상은 한족의 中國이 아니었던 셈이다. 광대한 지역에서 이루어진 중국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하나일 수 없었다. 최소한 지리적으로 황하와 장강, 사상적으로 유가와 도가, 인종으로 한족과 소수민족, 정치적으로 봉건중국과 新중국 정도로는 구별할 수 있어야 어느 정도 중국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같은 중국 역사이면서도 이렇게 극단적인 대척점들은 어느 것도 중국의 객관적 진면목이 아니다. 중국 정부의 정책은 극단적 양면성을 절충한 결과로 나오기 때문에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상대할 실체가 아니다. 중국의 다중적이고 복합적인 성격을 모르고 중국을 하나로 이해하려 한다면 對중국 정책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늘 중국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우리가 대처하는 중국 정책은 늘 실패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중국의 다중성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봉건中國과 新중국이다. 新중국이란 공산당 정부 수립 이후를 말하는 것으로 과거의 봉건 중국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中國이 정식으로 국가 명칭이 된 것도 新중국 이후부터였다. 공산당 정권은 과거의 모든 역사 문화를 부정하였으므로 전통적인 중국하고는 단절을 선언한 셈이다. 모택동의 공산당 정권은 봉건주의의 중국을 철저히 부정하였으므로 지금의 중국을 이해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중국에 대한 인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지금의 중국은 과거 우리가 생각하던 明나라와 같은 大國하고는 차이가 많다. 우선 明은 우리를 구원해 준 우호적 역사였지만 지금의 중국은 공산주의로서 우리를 분단시킨 주역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 사정에 우리의 정치이념과 달라 우호적이지 않다. 과거의 중국은 우리와 같이 유가사상을 기반으로 하였지만 新중국은 反유가적이어서 우리의 가치관과 많은 차이가 있다. 과거의 중국은 늘 우리 문화를 선도하였지만 지금은 우리가 문화의 선도자이다. 과거의 중국인들은 우리에 대해서 우월의식과 함께 여유가 있었는데 지금은 특유의 자존심은 여전하나 대국의 여유가 없어 조급하고 편협하고 각박하다. 그래서 옛날 대국의 풍모는 사라지고, 되놈의 완력을 앞세우는 일이 많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중국이 좋을 때는 ‘대국’이라고 했고, 싫을 때는 ‘되놈’이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툭하면 완력을 내세우는 그들을 늘 되놈 취급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그들의 완력과 풍모를 동시에 실감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홀대론이나 성과론이 난무하지만 둘 다 옳은 말이다. 홀대는 되놈의 완력에서 나온 것이고, 성과는 대국의 풍모가 드러난 현상이다. 그 결과는 우리의 잘잘못도 있겠지만 중국의 양면성의 결과이기도 하다. 문 정권의 대중국정책에 대한 비판이 많지만 역대 어느 정권도 대중국정책에 성공한 적이 없었다.
중국 특유의 다중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우리는 중국과의 외교에서 성공하기 어렵다. 저들은 역사적으로 정밀하게 축적된 이른바 합종연횡이란 외교책략으로 우리를 속속들이 간파하고 있는데 우리는 움직이는 표적과 같은 중국을 바라보는 안목이 매우 어설프다. 중국의 확고한 역사의식, 패권적 통치전략, 교묘한 권모술수, 현란한 외교책략, 민활한 스파이전술은 감정적이고 단순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이다. <삼국지연의>를 재미있게 읽는 것도 좋지만 거기에서 중국의 무서운 계략과 술수를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기원전에 이미 쓰여진 <춘추> <사기>를 보면서 기껏 천 년도 안 된 우리의 <삼국사기>를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의식 수준이기 때문이다. 중국적 외교술책을 공유하는 북한도 우리가 미칠 수준이 아니건만 우리 정부가 하는 외교수단을 보면 그에 대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을까 싶다. 모자라는 부분이야 채우면 되지만 모자란다는 사실조차 모르면 방법이 없다. 우리의 외교미숙은 역사적 약점이다. 고려 이후로 중국만 상대해 온 우리의 외교는 매우 단순화되어 있었다. 조선의 임진왜란, 병자호란은 우매한 우리 외교술의 혹독한 대가였다. 지금도 미국 일변도의 외골수 외교정책으로 단조롭기 짝이 없어 불안하다. 교토삼굴(狡免三窟)이란 말이 있다. 영리한 토끼는 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세 개 이상의 굴을 파 놓는다고 한다. 오로지 미국에만 목을 매는 우리가 토끼만도 못한 외교라면 막말일까? 30대 애송이 김정은이 중국, 러시아와 벌이는 현란한 줄타기 외교행보와 세계 최강 트럼프를 상대하는 배포를 보면 우리의 외교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수룩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외교는 병 주고 약 주고, 어르고 뺨치고, 등 치고 간을 빼먹을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외교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는 왕초보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생각이다. 거기에다가 야당은 정권흔들기에 국익외교에 사사건건이 어깃장을 놓고 있으니 초보운전에 방해꾼까지 동석하고 있는 꼴이다.
등소평의 개방정책 이후 신중국은 급속도로 국력이 강해져 이제는 미국과 양강을 호언할 정도가 되었다. 중국의 다중성이 한 가지 더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군사력, 경제력에 한정된 것이지 정신문화적 수준은 아직 후진국에 머무르고 있다. 국력이 강하다고 하여 품격도 높은 것은 아니다. 트럼프 이전의 미국과 지금의 미국과는 그 품격이 전혀 다르다. 지금의 미국은 거의 조폭 수준이다. 옛날 元나라는 세계를 호령하였지만 그 품격은 최악이었다. 一帶一路일대일로를 호언하며 군사, 경제대국을 뽐내는 중국도 매우 탐욕스럽고 기형적인 모습이어서 옛날 元나라의 기미를 강하게 풍긴다. THAAD에 대한 보복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지만 대국의 품격으로는 걸맞지 않다. 서해어장에서 중국어선들의 막무가내 행태가 중국의 참모습은 아니겠지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끔찍하다. 일국의 대통령을 국빈 초청해 놓고 경호원이 기자를 폭행하는 것이 그들의 수준이다. 중국에서 건너오는 황사와 스모그는 우리를 견디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게 하고 있다. 아무리 증거를 갖다 대도 도무지 자기들의 소행이란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무한 코로나로 세계를 공황으로 빠트려 놓고 사죄는커녕 큰소리를 치는 철면피이다. 일본이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 정말 가까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야말로 만난 것이 불행한 이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나라와 가까이하면 맹수, 조폭 옆에 있는 것과 같다. 국가의 수준은 무력, 경제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품격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품격은 단시일 내에 갖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엄청난 인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동물들은 위험하다. 최근에 중국인들이 새로 꽃게와 오징어 맛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어장이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중국 정부에서는 일부 지각없는 뱃놈들의 짓이라고 하지만 우리 눈으로는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다. 국민을 대상으로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 어민들의 국제적 횡포를 막을 수 없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왕성한 식욕과 탐욕은 우리 어장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장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중국 '대지'를 휩쓸었던 메뚜기떼처럼 몰려다니면서 세계의 바다를 싹쓸이하고 있다. 그 폐해는 일본의 핵오염수 해상방류나 '고래사냥' 정도가 아니며, 더구나 우리의 '개 도살' 정도가 아니다. 사회주의 특유의 주입식 사상교육을 받아온 중국인들은 능동적인 민주시민 의식이 부족하다. 중국인들의 긍지와 양심이었던 仁義인의 정신을 타파해야 할 부르주아 정신이라고 배워 온 新중국인들은 유물적, 국수주의적 사고에 젖어있어 가까운 이웃으로 지내기에 부담이 크다.
공산당 이후의 新中國人과 옛날의 중국인들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정부의 사회주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그들의 가치관은 중국정부의 정책과 다를 바 없다. 절대독재자 시진핑은 곧 중국이요, 중국인이다. 중국인한테는 人權인권보다는 食權식권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되면 다른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지금 홍콩인들이 벌이는 저항운동은 그들이 신중국인이 아니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역설적이지만 정부와 국민 사이의 불일치는 곧 우리와 미국과 일본의 경쟁력이요, 저력이다. 그런데 우리는 트럼프와 미국인은 구분하면서도 아베와 일본인은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을 얕보고 미워하지만 냉철히 생각하면 우리가 일본인에게서 배울 점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성리학에 찌들어 있을 때에 그들은 서구의 문물을 일찌기 받아들인 역사를 인정해야 한다. 특히 그들의 이성적, 합리적 사고와 집단의식, 장인정신은 우리가 본받을 만한 점이다.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나 지금의 아베 때문에 일본인까지 미워한다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를 무시하고 싫어하는 일본인이 있다고 해서 우리도 그런다면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들이 일본에 적개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가능하다면 일본 정부와 국민은 구분했으면 좋겠다. 이런 원리는 중국인도 마찬가지이다. '조센징', '까오리빵즈'가 싫다면 당연히 '쪽발이', '되놈'도 듣기 싫은 것이다. 싫건 좋건 우리와 중국과 일본의 국민 수준, 民度민도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민통치에 익숙해진 중국인들은 중국정부와 별로 다르지 않고, 그것은 좀처럼 개선되기 어렵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북한이 또 걱정이다. 북한 주민은 김정은과 어떻게 다르며 그 민도는 어떨지 생각해 보면 아찔한 일이다.
중국인은 돈과 재물을 몹시 좋아하므로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를 내세우지만 생리적으로는 철저한 자본주의자, 황금만능주의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중국의 사회주의는 이른바 ‘중국의 특수한 사회주의’로서 중국의 국수주의와 다름없다. 강력한 국수주의로 무장한 중국에는 불가역의 국가정책만 있을 뿐, 民心이란 것이 따로 있을 여유가 없다. 정부와 민심이 일치된다면 좋은 점도 많겠지만 정부가 잘못되면 민심도 나라도 잘못될 수밖에 없으니 위험한 일이다. 정부가 잘못하면 이를 견제할 세력이 있어야 바로 잡을 수 있는데 중국에는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천안문 사건이나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 정도로는 거대한 천안문에 흠집 하나 남길 수 없었다.
우리에게 4․19, 6․29, 촛불이 없었다거나 선거혁명이 없었다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의 최대 약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민심, 천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양심적이고 유능한 지도자가 이어지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 新중국의 최대 약점이다.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중국은 일시에 무너질 수 있다. 덩치 큰 자가 한번 중심을 잃으면 쓰러지기 십상이다. 신중국의 역사가 70년이 되었지만 중국 역사에 70년을 못 넘긴 왕조가 허다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미 新중국도 짧지 않은 역사를 누린 셈이다. 절대권력은 보기보다 내구성이 없다. 그러고 보면 미국도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려온 지가 70년이 넘었다. 사람으로 따지면 노년이 된 것이다. 트럼프의 등장은 우연이 아니다. 중국이 미국을 버리고 자기 줄에 서라고 요구하더라도 아직 조심스럽다. 위험한 담장 옆에 있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 중국의 공자인데 중국도, 미국도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하나는 무너지는 담장이요, 하나는 쌓다 만 담장 같아서이다. 중국의 횡포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할 바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은 그래도 합리적인 태도는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은 그것마저도 없다는 사실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작은 이익에 눈이 어두워 중국에 경제적으로 깊이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우리 기업들은 더 이상 중국에 예속되는 투자를 말고 우리 실업자를 구제할 방도를 찾는 것이 장기적인 기업경영일 것이다. 지금 미국이냐, 중국이냐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한말 조선의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
곁들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중국 내의 조선족이다. 조선족이란 이름은 중국 국민으로서 소수민족의 하나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中國국민이라는 의미가 전제된 의미가 더 크다는 말이다. 과거에는 조선인이라는 긍지가 있어 조선족이라는 이름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동포라는 말보다는 조선족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세대가 바뀜에 따라 이제는 조선인이 아니라 중국인이라는 의식이 굳어진 것이다. 더구나 최근 중국의 국력이 강해지고, 경제형편이 좋아지고 나서는 이러한 추세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조선족들은 누구보다도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을 많이 했어야 했지만 이제 그 선택의 갈등에서 벗어난 것이다. 거기에다가 한국인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들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더구나 연변의 조선족 자치구 내 조선족의 세력은 점점 쇠약해져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만약 자치구마저 붕괴된다면 조선족 자체가 사라질 것이다. 조선족이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아프고 쓰라린 일이다. 그들은 우리가 보듬지 못해 조국을 등져야 했으며, 그중에는 나라를 찾기 위해 조국을 떠난 애국자들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족은 우리의 상고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 옛 땅에 우리 민족이 존재해 있다는 것은 우리의 강역 확인에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족은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고, 우리 정부도 특별한 관심을 가지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조선족은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고, 자의건 타의건 우리 품 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피가 점점 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역사가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감히 중국에 대해서 아는 것처럼 말했지만 어림없는 일이다. 어찌 중국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중국에 대해서 말하는 순간 그건 이미 중국이 아닐 정도로 중국은 종잡기 어려운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우리가 이해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언젠가는 현재의 외교구도에 변화가 필요하다면 이는 국가적 과업이 아닐 수 없다. 중국 단체관광이나 학생들이 중국어를 배우거나 기업체가 교역을 확대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마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생각나는 대로 몇 마디 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