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유감
‘돈’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모르지만 ‘돌고 도는' 이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린다. 돈이 돌지 못하고 부동산이나 은행, 부잣집 금고에 갇혀있으면 나라의 경제가 막힌다. 옛날에는 經濟란 세상을 다스리는 모든 수단을 말했으니 경제란 그만큼 중요한 일이다. 정부에서 가진 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 국민생활지원자금을 적극 시행하는 것도 서민경제를 활성화함으로써 막힌 경제를 풀어보려는 정책이다. 이를 포퓰리즘이라 매도하는 사람도 있지만 국가경제가 부진한데도 긴축재정을 고수한다면 경제적 무능이다. 그렇다고 돈을 너무 돌리면 머리가 ‘돈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돈에 지배당하는 타락한 자본주의자가 되기 쉽다.
돈은 부와 권력의 化身이지만 엄연히 한 나라의 재화표지물이요, 유통도구요, 상징물이다. 그래서 돈에는 그 나라의 위인들이 자주 등장하기 마련이다. 현행 화폐로 말하면 충무공, 퇴계, 율곡, 세종대왕, 신사임당이다. 모두 존경할 만한 역사적 인물이지만 액면가와 인물을 비교하면 격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면 세종대왕이라는 데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충무공이 조선을 구했다면 세종대왕은 겨레의 역사를 구했다. 그래서 최고액면가인 만 원짜리에서 걸맞은 대우를 받았다. 나중에 5만 원짜리가 생겨 신사임당에게 추월을 당한 것은 좀 아쉬운 일이다. 이에는 페미니즘의 응원이 있었을 것이고, 아들을 잘 둔 덕도 보았을 것이지만 여성으로서 최고액권을 차지한 것은 행운일 수 있겠다. 그런데 나라를 구한 충무공을 겨우 100원짜리 동전에 모신 것은 아무래도 죄송스럽다. 거기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서민의 지갑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노릇도 면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1000원짜리의 퇴계, 5000원짜리 율곡은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다.
퇴계, 율곡의 윤리적, 학문적 업적을 칭송하지만 그분들이 신명을 바쳤던 성리학은 당대에도 이미 구시대적 유물이었다. 그때에 일본은 성리학 대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고, 중국은 성리학을 벗어나 고증학이 중심이 된 시대였으니 성리학에 목매었던 조선은 시대착오적 행위였다. 성리학을 배척한 일본이 신흥강국이 되었고, 성리학에서 탈피하지 못한 중국이 무너진 것을 보면 조선의 멸망도 성리학의 탓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퇴계, 율곡은 성리학의 중심에 있던 학자였다. 그런 인물을 돈에 모셔놓고 우리의 상징으로 삼는다면 역사를 잘못 해석한 것이 아닐까? 펄쩍 뛰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性理學은 발상지인 중국에서조차 신유학(新儒學)으로 배척된 극단적 원리주의이다. 공자의 정통유학은 철저한 현실주의, 따뜻한 인본주의, 건전한 생활철학이었다. 실학의 實事求是(실사구시)가 바로 정통유학의 실천정신이었다. 그것을 정연한 理氣(이기)론으로 관념화시키고, 현학적 思辯(사변)철학으로 변질시킨 것이 宋의 성리학이다. 도교와 불교에 경도된 주희는 공자를 신격화하기에 이르렀고, 그런 성리학을 불가침의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인 것이 조선의 유학자들이었으며, 그 핵심에 있던 인물이 퇴계, 율곡이었던 것이다. 비단 그들뿐 아니라 조선의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질곡에서 한 발도 벗어나지 못했다. 주희의 <聖學十圖>(성학십도), <朱子家禮>(주자가례)를 철칙으로 삼아 공허한 관념론, 사대주의, 문약(文弱), 허례허식으로 일관하여 역사를 그르치더니 필경 조선을 멸망케 하였다. 新유학이 아니라 허망유학이었다. 정통유학마저 구시대적 유물인데 아직도 성리학에 갇혀있다니 역사가 돈 일이다.
주희는 뛰어난 학자로 존중받았지만 정통유학의 내용과 정신을 심각하게 왜곡, 오도하였다. 그가 말한 4서 중에 공자의 <논어>, 맹자의 <맹자>는 사실로 인정되지만 <大學> <中庸>을 子思(자사)나 曾子(증자)가 지었다고 하는 주장은 주희가 꾸며낸 허구이다. 공자는 선과 악은 후천적 습성(習性)에 의해서 결정된다 하였고, 理와 氣를 따로 논의한 바 없지만 성리학자들은 맹자의 性善說(성선설)과 理氣論(이기론)을 체계화하여 空理空論(공리공론)의 빌미를 만들었다. 孔孟은 忠을 ‘일관하는 인간의 의지-中心’으로 규정하였지만 성리학자들은 왕권에 투합하여 ‘권력에 대한 절대복종’으로 변질시켜 선조, 인조, 고종과 같은 暴君昏君(폭군혼군)까지도 옹호하였으니 反민주적, 非인간적이었다. 그들은 맹자가 공자의 손자 子思를 계승했다고 했지만 정작 맹자는 공자를 私淑(사숙-책을 통해서 배움)했다고 했지, 자사를 스승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주희는 曾子가 <대학>을 지었다고 했지만 <대학>과 <중용>은 아무리 빨라도 漢 이후의 산물이니 이 또한 허구이다. 맹자를 공자의 계승자로 추존했으나 정작 공자의 계승자는 荀子(순자)라는 것이 고증학자들의 주장이다. <대학>과 <중용>의 문장은 <논어> <맹자> 보다 더 정연하고, 세련된 修辭(수사 Rethoric)라서 주희의 주장과는 달리 漢 이후의 산물이 틀림없다는 것이 文獻學(문헌학)의 상식이다. 주자가 일생을 바친 경전집주(輕典集註)도 왜곡이 많았기에 고증학자들이 그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나 우리 유학계에서는 이 엄정한 질정을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 배척하였다. 이익, 정약용과 같은 우리 실학자들도 고증학의 관점으로 주희의 주석을 수정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초야에 묻혀야 했다. 고증학, 실학의 정신은 이념화된 성리학에서 원래의 공맹실천유학으로 회귀하자는 정풍운임에도 불구하고,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도 있었다. 주희는 공맹을 숭상하여 신격화했지만 그로 해서 공맹을 진부한 사상가로 만들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리의 유학계는 지금까지도 주희의 주장이나 경전주석만을 고집하고 있으니 유학을 위해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퇴계, 율곡은 뛰어난 석학이었고, 유가적 윤리를 확립한 공적도 인정해야 하지만 정통유학과는 다른 성리학을 주도하여 역사를 퇴행시킨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어차피 나는 돈에 눈이 어두운 구세대이지만 신세대들에게는 돈에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세상을 다스리는 경세제국(經世濟國)의 일환이다.